2023.11.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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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방학특집] 장성려리의 사진에세이: 타인의 고통

회대알리를 발행하며 매번 고정적으로 사진 이야기를 했는데, 방학 중 컨텐츠로 사진 이야기를 또 하려니 새삼스럽다. 이번에는 학기 중 지면에서 미처 하지 못했거나, 혹은 일부러 하지 않기도 했던 이야기들을 조금씩 하려고 한다. 바로 ‘포토 다큐멘터리’, 혹은 포토 저널리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름은 수전 손택이 지은 동명의 책에서 빌려 왔다.

 

2015년 4월 11일, 광화문 광장

이 사진으로 공모전에서 상까지 받았건만 쉽게 꺼내 보기 힘든 사진이다.
이런 일에 대한 사진을 찍고 기억한다는 것은 퍽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돈이나 커리어 때문이었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포토 다큐멘터리, 혹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면, 다큐멘터리란 것은 생각보다 방대하고 그 때문인지 생각보다 모호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불과 일이 년 전까지 사진계에서는 다시 다큐멘터리가 인기 있는 장르로 부각되곤 했지만, 다큐멘터리를 한다는 사람들은(심지어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가는’ 상업사진가인 김중만까지도 다큐멘터리를 시도한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대부분 각기 다른 것들을 다큐멘터리라고 불렀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위에 다큐멘터리란 ‘생각보다 방대하다’고 적어 놓기도 했고. 누군가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처럼 세렝게티로 떠났고, 누군가는 전쟁터로 떠났다. 누군가는 대게잡이 어선을 탔고, 또 누군가는 물대포 앞에 서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의 폭을 좀 좁히자면 방금 같은 예시들을 들 수 있을 텐데, 어쩌면 목숨까지 걸 정도로 위험하거나 다급한,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환경이나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저 돈이나 이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 수도, 아니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욕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지점이 상업 사진을 비롯한 다른 분야들과 다큐멘터리, 혹은 포토저널리즘이 (어찌 보면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리라 생각한다.

 

2015년 4월 18일, 광화문 인근

광화문 앞에 감금당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러 가겠다며 버스를 뒤흔들고, 최루액을 맞고, 물대포를 뒤집어썼다.
나도 오만 것들을 뒤집어쓰고 차벽 아래로 기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 했던가.
내가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너는 왜 다큐멘터리를 하고, 어떤 다큐멘터리를 하느냐?”라고 물으면, 사실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다. 일단 내가 왜 사진을 찍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처음 카메라를 잡게 된 것은 2011년 말이었다. 그 해에 수능을 보고 나서 마침 얼마 안 가 한-미FTA가 터져버렸는데, 사람들은 칼바람을 뚫고 거리에 모였다. 나도 그곳에 있었는데, 다만 나는 맨몸으로 나가는 대신 집에 있던 캐논의 보급형 DSLR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게 나와 카메라의 첫 인연이었다. 사진에 대해 그리고 카메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3회 정독’이 생명이라던 매뉴얼 한 번 들춰본 적도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찍었고 되는대로 남겼다. 그때 사진들(실수로 많이 날려 먹었지만)을 보면 지금보다 질이 떨어지는 사진들이 많지만, 그게 내가 카메라를 잡고 사진을 찍게 된 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1월 7일, 쌍용자동차 오체투지 첫날

구로 쌍용차 정비사업소부터 시작한 오체투지 첫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사람들이 몸을 땅바닥에 오롯이 대던 찬 겨울날이었다. 밤을 꼬박 샌 데에다 손이 얼어붙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온 몸이 얼어붙어 있던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행진에 동행하며 참 미안하기도 했고, 이런 것들을 잘 기록해 남겨 놓아야겠다는 책임감 비슷한 것도 들었다.

처음 카메라를 잡게 된 계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내심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무작정) 대개 길 위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덕분에 험한 꼴도 많이 당했는데 물대포나 최루액은 남부럽지 않게 맞아봤고 사진 찍지 말라는 위협을 받거나 연행을 당할 뻔한 적도 많았다. 경찰서에서 못해도 너덧 번은 다녀왔고 검찰 조사도 두 번 받았다. 사진 찍는 것도 참 힘들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그 때문에 소속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도 했는데, 마침 그때 회대알리가 생겼다. (웃음) 그런 사진들을 찍으면서 오만가지 험한 꼴 중 제일 험한 꼴인 ‘빨간 줄’은 안 당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6년 6월 28일 서대문구 북아현동 철거지역

북아현동을 알게 된 것은 2012년 곱창집을 운영하던 부부의 철거 농성장을 방문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후로 그 뒤에 있던, 충정로 부근부터 이대 근처에 이르는 북아현동 철거지역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 지역들이 변하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많지도 않고 오래 머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사진을 촬영하던 지역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이런 모습들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직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방대한 다큐멘터리 안에서 주로 촬영하고 만들어내는 작업 물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집회/시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카메라를 처음 잡은 계기이기도 하고, 제임스 낙트웨이나 로버트 카파, 뱅뱅 클럽 등의 전쟁 사진가들의 사진들이나 다른 시위(예컨대 아랍의 봄 같은) 사진들을 접하며 지속해서 찍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이슈에 계속 관심을 두었던 것 또한 큰 요인일 테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진들만 찍는 것은 아니고 다른 주제나 소재들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예컨대 서대문구 북아현동 재개발 이슈에 관심을 둔 후로는 재개발이나 강제 철거에 관련된 사진들도 찍고는 하는데, 북아현동 말고도 종로구 익선동이나 마포구 염리동,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알려진 구룡마을, 아니면 용역 깡패가 가게를 다 뒤집어 놓았던 라떼킹 강남역점 등이 그랬다.

 

2015년 2월 15일 라떼킹 강남역점

용역 깡패가 들이닥쳐 가게를 풍비박산 낸 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게 앞에 진을 치고 화장실 앞까지 점거하고 있었다. 그곳에 연대하던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화장실 앞에 있던 깡패들을 내쫓았는데, 나도 무슨 용기인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50mm 단렌즈를 들고) 저곳으로 갔다. 내 쪽을 돌아보는 강한 눈빛의 소유자가 바로 그 용역 깡패 중 한 명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한구석이 무서운 순간이었다.

또 생각해 보니 (그렇다고 사진을 그렇게 오래, 또 전문적으로 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진들도 꽤 많이 찍었던 것 같다. 신영복 교수님 영결식 때의 사진도 찍었고 학교 대동제에서 동아리가 공연할 때의 사진도 찍었다. 또 페이를 받고 인물 사진도 찍어 보았고 이런저런 스냅 사진도 많이 찍었다. 얼마 전에는 한 컷에 필름이 7cm*6cm짜리인 중형 필름 카메라(흔히 말하는 필름 카메라는 한 컷당 크기가 36mm*24mm이다. *단위가 다르다*)를 사서 사진을 찍고 있기도 하다. 써 놓고 보니 정말 별짓을 다 해 봤구나 싶다. 그리고 회대알리 사진팀장으로서 사진을 찍는 것은 물론이고, 부족하나마 사진을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아무런 스승도 멘토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비슷한 것이 되고, 또 나보다 더 잘 나고 더 나은 사진가가 나왔으면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나름대로 사진을 계속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다. 계속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려고 많은 생각을 하곤 하는데, 적어도 사진에 있어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사진을 재미있어 하는 것일 테고.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농민들은 농작물을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걸 불사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지 짐작이 잘 안 간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잘 나온 사진이라는 생각 외에, 참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그 날, 나도 그곳에 있었다.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런저런 변죽만 잔뜩 울리다 마무리 짓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아무튼, 온라인판이니 광고를 하자면 나는 사진을 페이스북에도 올리지만, 그 외에도 사진 업로드 사이트인 플리커나 친구 사진가와 함께 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그리고 인스타그램에도 많이 올린다. 하지만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eerie_sicness고, 페이스북 페이지는 <Project; 가장자리>고, 플리커 주소는 Flickr.com/MySICNESS라는 것을 나는 절대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알아서 잘 찾아보시지!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

비가 많이 왔다. 14년에도 15년에도, 16년에도.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역시 50mm 단렌즈로) 카메라를 잡고 사진을 찍었는데, 저 사진은 찍고 나서 여러모로 슬픈 사진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집에서 별일 없이 TV나 봤을 비 오던 토요일이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남들이 비를 맞고, 빗물에 눈물을 흘려보내던 모습을 남겨야 했다. 세월호는 여러 의미로 절대 잊을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일 것이다. 사진가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전쟁 사진가(War Photographer)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 포토저널리스트인 제임스 낙트웨이는 “나는 목격자였고, 이 사진들은 나의 증언이다. 내가 기록한 이 사건들은 잊혀서도 안 되고, 다시 반복되어서도 안 된다.” 는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이 말은 다큐멘터리나 저널리즘을 하는 사진가들이 절대 잊을 수도, 또 잊어서도 안 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돈도 안 되고 위험한 사진을 하는 포토그래퍼들은 절대 잊혀서도 반복되어서도 안 되는 사건들을 맨 앞에서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말을 절대 잊거나 쉽게 넘기려고 하지 않는다. 잊어버리는 순간 내가 남기는 사진들은 증언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포르노그래피로 남기 때문이고, 어쩌면 그것은 포토그래퍼들의 영원한 딜레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새삼 깨달은 계기가 작년 4월 18일, 기어서 광화문 앞까지 가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을 때였고, 11월 14일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는 것을 봤을 때였다.

 

타인의 고통은 타인만의 고통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전시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시키는 것이 이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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