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대알리| * 본 기사는 교지의 기사를 기반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해당 기사의 어투와 표현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고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제1화 지난 이야기
2010년, 예감은 들어맞았나
2010년, 좋은예감 총학생회와 중앙운영위원회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졸업준비위원회(졸준위)를 해체시키고 그 업무를 총학이 담당하도록 했다. 졸준위 위원이 공정치 못하게 선임됐다는 것과 졸준위의 앨범 사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만 볼 때,그 해의 하계 졸업식은 매우 불쾌한 추억으로 남았다.
당시 총학생회가 내세운 이유 중 첫 번째인 졸준위 위원 선임 문제는 분명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여기서 학칙을 잠깐 보면,
제 85조 (구성)
각 단대 졸업준비위원은 다음과 같이 선임한다. 차기 년도 학생회 선거 전까지, 당해 연도 단대 학생회장이 6학기 이상 등록을 필한 자 중 1인을 추천하고, 단대 운영위원회에서 인준을 받는다.
참고로, 중앙운영위원은 단대 학생회장들이다. 그리고 학칙에 따르면 졸업준비위원회는 각 단대 학생회장의 추천을 받고 그 회장에게 인준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구성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단대 학생회장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임이 어떻게 졸준위의 해체로 결론지어졌는지 그 과정의 논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졸준위를 해체시킨 또 하나의 이유인 앨범 사업 문제는 다른 의미에서 더욱 석연찮았다. 당시 많은 대학들이 졸업 앨범 사업을 큰 수입원으로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학교 졸준위도 앨범 사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졸준위에는 수백만원의 빚도 함께 존재했다. 졸준위에 있던 빚은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 졸준위에게 그대로 물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졸준위는 앨범 사업을 통해 발생한 수익이 충분했음에도 이 빚을 갚지 않은 채 방치했다. 그러자 총학은 졸준위의 부실하고 불투명한 운영을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졸준위 업무를 총학으로 이관시켰다.
그러나 졸준위가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업무를 하루아침에 총학이 담당하는 것은 ‘무리수’였음이 곧 드러났다. 그해의 하계 졸업식에서는 ‘졸업식 행사 진행도 엉망이고 졸업 가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안내하는 총학 임원 표정이 썩어 있더라’하는 졸업생의 불만이 쇄도했다. 총학의 미숙한 진행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게다가 총학 집행부가 졸준위 관련 일부 현금을 분실하며 졸준위 이관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게 된다. 결국하계 졸업식은 매우 불쾌한 추억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한편 좋은예감 총학생회 임기 중 발족된 감사위원회는 교지대금을 총학 통장에 그대로 보관하며 ‘학생들이 교지를 보긴 하나요? 왜 필요하죠?’ 하는 교지의 실존적 문제를 짚어주기도 했다. 교지편집위원회가 당시 자치회비 감사에 수차례 불응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학생회 감사위원회는 교지가 감사에 불응하자 교지대금 집행을 중지했고, 결국 2010년 하반기 감사에 교지가 응하며 교지대금 집행 중지가 풀렸다.
ps. 2010년 당시 교지는 “교지대금 감사는 언론에 대한 탄압이다” “교지는 서울캠퍼스와 글로벌캠퍼스에서 함께 운영하므로 서울캠퍼스에서만 감사받을 수는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학생회칙의 제 9절 감사위원회에 따르면,
제58조 (범위)
제1항 감사위원회는 일차적으로 총학생회와 특별기구, 교지대금과 관련한 교지의 감사에 한한다.
즉, 교지편집위원회는 감사위원회의 감사에 응할 의무가 있으며, 응하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이다.
ps. 당시 졸준위 돈 2000만원은 집행국장의 개인 통장에, 교지대금은 총학생회장의 개인통장에 있었다. 이는 명의가 개인명의일 뿐 학사종합지원센터를 통해 학교에 신고 된 ‘공적인 통장’이었다. 참고로, 현재 교지는 연간 8천만원에 달하는 교지대금을 교지 측 개인명의의 통장에 보관하고 있으며, 프로모션 등으로 얻은 광고수입을 제외하고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제 2화 지난 이야기
2011년, 통폐합 효과
나비효과 총학생회는 ‘소통하는 총학생회’를 위해 싸이클럽을 개설하고 총학게시판에 담당자를 배치하고 트위터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총학게시판에 ‘총학은 어디갔냐’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총학은 학교와의 불공정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주요 줄거리1
박철 총장이 교비를 횡령했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가 난 뒤 일주일 뒤에 있었던 총학생회와 총장과의 면담에서 총장은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4월 25일 한겨레에서 다시 한 번 횡령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이후 학생처장명의로 온 메일에서는 ‘다른 학교에 비하면 경미한 결과이며 이는 외대가 깨끗하게 운영됨을 반증’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총학생회는 이에 대해 자보를 내 걸고 두 번의 집회를 벌였으며 총장 퇴진 운동을 결의하는 비상총회를 성사시켰다.
주요 줄거리2
이후 학생회는 잠잠했다. 하지만 가을, 본·분교 통폐합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학내에 크고 작은 파고가 일었고 총학은 본·분교 통폐합, 복수전공, 노천지하, 교비삭감 등 학내 문제해결을 위한 비상 총회를 열고, 결국 한 해 두 번의 비상총회 성사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학교가 4대 요구안을 수용한 것이다. 이로써 나비효과 총학은 비상 총회를 성사시킨 학우들과 학생회의 노력 덕분이다라고 성과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몇몇 학우들은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학교 측의 발표일은 11월30일, 정확히 비상총회가 끝나고 한달하고도 5일이 지난 때인데 학교 측이 말을 뒤집었을 경우에 대해 어떠한 후속조치를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추운 날씨, 기말고사 목전, 내년총학선거, 현 총학임기 말이라는 학내 정치에선 무시무시한 악 조건이 산재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제 2.5화 지난 이야기
2011년, 산산이부서진 선거
2011년 겨울에는 21세기 들어 첫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그 과정에는 가을 선거 보이콧(?)과 투표율 미달로 인한 선거 파행이 있었다.
주요 줄거리1
선거 초기부터 기호 1번과 기호 2번 선본에 대해 무수한 비판이 쏟아졌다. 1번 선본은 사회대 학생회 출신 위주로, 2번 선본은 중국어대 학생회 출신 위주로 꾸려졌는데 특히 2번 선본은 학내에 수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다함께’ 소속이었던 사람들이 중심축이라는 말이, 1번 선본은 지난 2010년 총학과 관련이 깊다는 말이 돌았다.
2번 선본에 대한 학우들의 거부감은 2번 선본이 지난 본·분교 통폐합 문제 때 ‘한국 사회의 학벌제 철폐’를 외치며 당당히 통폐합을 찬성하는 취지의 찌라시를 돌린 일로 불거졌다. 2번 선본의 철학 자체는 생각해 볼만하지만, 당시 서울 캠퍼스 학우에게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물론 이후, 학우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2번 선본은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다음대 총학생회를 꾸리게 되는 서양어대 학생회장 정상혁(프랑스어 09) 군의 ‘넌지시 보이콧을 이야기하는’ 글이 훕스라이프에 올라왔다.
정상혁 서양어대 단대장
먼저, 이 글은 서양어대 학생회의 입장이 아니라 저의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임을 알립니다.
(전략)
...저는 1번 선본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멀리 43대 총학생회, 44대 총학생회까지 갈 것도 없이, 올 해 사회대 학생회, 사범대 학생회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10월부터 1번 선본은 서양어대 학생회, 법대 학생회에게 공동 선본을 꾸리자고 줄기차게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1번 선본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봐온 1번 선본(의 대표를 비록한 주요 선본원분들)은 대표자로서 신뢰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비리총장문제가 터졌었습니다. 당시 서양어대 학생회, 중국어대 학생회, 동양어대 학생회 등이 주축이 되어 집회를 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총장 비리를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대 사범대는 말로만 총장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6월 입장을 뒤바꿔 학우들의 의식 수준이 낮기 때문에 투쟁을 접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과연 그들이 책임지고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지난 10월 임시전학대회에서 단식, 총회개최 등을 통해서 4대 요구안을 주장하자고 결정할 때만 해도 당시 사회대 학생회장은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니, 단식을 하거나 총회를 다시 여는 것은 무리이며 다음대 학생회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투쟁이 막상 시작되고 나니 단식은 함께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부스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선전전에서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후략)
제 3화 지난 이야기
2012년, 이상한 동거였을까?
선거 파행 이후, 다시 치러진 봄 선거에는 정상혁을 정후보로 한 선본이 등장했고 당선됐다. 놀라운 것은 이 선본의 집행위원장으로 지난 1번 좋아요 선본의 강지우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당선 된 HUFS IN U는 임기 말 대대적인 운영비 영수증 감사에 직면한다.
주요 줄거리1
앞서 보았듯, 당시 서양어대장 정상혁은 1번 선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늘어놓았다. (게시글을 지우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하지만 봄, 그는 1번 선본의 부후보자였던 강지우와 함께 선본을 꾸린다. 참고로 정후보자였던 송준혁은 외대발전추진위원회장을 맡았다. 이에 정상혁은 총학생회 선거 공청회에서 의외의 선본 구성에 관해 쏟아지는 질문을 받았으며 당선 후 훕스라이프 및 페이스북 계정에 당선사례를 올리며 다시 한 번 좋아요 선본 일부와 함께 한 경위를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학우여러분 반갑습니다. 당신의 외대, 당신으로 가득찬 외대를 만듭니다. 제 46대 총학생회 HUFS in YOU 총학생회장 당선자 프랑스어과 4학년 정상혁입니다.
(전략)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11월 총학선거 당시 좋아요 선거운동본부를 비판했던 제가 왜 당시 선본들과 함께 했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훕라와 페이스북의 글을 통해 11학년도 사회대 학생회와 사범대 학생회의 활동을 보면 과연 그들이 진정성이 있었는지 의심이 된다는 비판을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hufslife.com/6378109 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선거가 무산된 후, 당시 부후보를 맡았던 강지우 학우에게 연락이 와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습니다. 서로 당시 상황에 대해 토론을 했고, 비판점을 이야기했고, 극복 의지를 밝혔습니다. 또한 당시 11년도 사회대, 사범대 학생회는 물론 09~11년도의 총학생회 또한 치열하게 평가하고 비판하였습니다. 결론은 결국 학우들이 진정 주인 되는 학생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고, 기존의 틀을 넘어서서 외대 전체를 아우르는 총학생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11년도 사범대장을 맡았던 박완순 학우, 정후보를 맡았던 송준혁 학우와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오해를 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야합이다, 혹은 총학생회를 하고 싶은데 메이트가 없어서 결국 선택했다 등 많은 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회는 하나로 뭉쳐야 학교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재 외대의 학생회는 단지 서로간의 인적 네트워크가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운동권·비운동권이라는 서로간의 편견 아래에서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한 틀을 깨고 싶었습니다. 학우들이 진정 주인 되는 학생회를 건설하기 원한다면, 서로 편견을 버리고 크게 하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후략)
한편 봄 선거 당시 선거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계속된 선거 연장과 학생증이 없으면 투표할 수 없었던 초반과 다르게 모바일 학생증도 허용됐던 선거 후반, ‘자 6명 남았습니다’라는, 매우 인간적이고 솔직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언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바일 학생증을 살펴보면, 사진이 함께 나와 있는 요즘의 모바일 학생증과는 다르게 2012년에 쓰였던 모바일 학생증은 사진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바일 학생증은 신분증과 함께 제시돼야만 효력을 발휘했다. 이는 선거 초반부터 후반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됐던 원칙이었으며, 따라서 모바일 학생증이 초반에는 허용이 안 되고 후반에는 허용됐다는 말은 기자의 조사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또한 ‘자 6명 남았습니다’라고 외쳤던 선관위원(당시 영어대 학생회장) 한 명의 말로 당시 선관위원들이 어떻게든 선거를 성사시키기 위해 연대의식을 발휘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하다.
주요 줄거리2
11월, HUFS IN U는 약 1000만원을 간이 영수증으로 처리한데다, 누락된 영수증이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자치회비 관리 부실 논란에 휩싸인다. 게다가 ‘힐링캠프’라는 명목으로 800만원 짜리 제주도 기행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사상 초유의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됐다.
당시 사범대 학생회장 조봉현(영교 09) 군이 감사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감사위원회에는 회계사로 근무 중인 재학생까지 포함됐다. 자치회비 뿐 아니라 농활 등 각종 행사 회비, 교비, 장학금 사용내역까지 모든 부분에서 감사가 진행됐다.
문제가 되는 것은 1000만원이 명시된 간이 영수증이었다. 간이 영수증은 사업자 등록번호, 사업자 도장, 사업장 소재지가 함께 제출될 경우, 국세청에 전자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도록 하는 근거자료가 된다. 이에 HUFS IN U는 해당 서류들을 모두 준비해 감사위원회에 제출했다.
또한 ‘제주도 기행’은 중앙운영위원회와 전체학생대표자회의 등을 통해 사전 공유가 이뤄졌던 행사였다. 전체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자 공지가 한번 있었고, 페이스북에도 관련 공지 글이 올라갔던 점이 확인됐다. 그러나 방학 중이라 홍보가 부족했던 점은 분명하다. 당시 HUFS IN U 총학생회장 정상혁 군은 외대알리와의 인터뷰에서 “학교가 예정됐던 해외봉사 특별교비를 삭감하는 바람에 해외에서 국내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며 “예상보다 신청자 수가 적어서 해당 행사의 1인당 집행액수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감사위원회 역시 집행의 과정 및 방법에는 문제가 없으나, 집행액수가 컸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에 총학생회는 훕스라이프, 대자보, 페이스북 등을 통해 해명 절차를 거친 후 사과했다.
제 4화 지난 이야기
2013년, 외대의 촛불?
투명한 학생회와 직접 참여정책을 내세우며 당선된 외대스캔들은 학우들로부터 ‘열심히 일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 많은 학사제도에 관한 문제와 복지 공약을 마무리짓지 못했던 원인이 아니냐는 지적도 받았다.
주요 줄거리1
봄에 외대스캔들이 당선되기 이전, 지금의 총학생회장인 김범(국제 11) 군이 비상대책위원회장으로 있던 때에 학교는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노천극장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대항해 비대위는 학교 측에 7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함으로써 노천극장 철거에 조건부 합의했다. 새로운 공간이 노천극장의 기능을 반드시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바마홀 무료 대관도 7가지 요구조건 중 하나였다.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7가지 요구조건에 명시됐던 간이무대를 위한 나무덱 설치나 벤치 설치도 마찬가지로 무시됐다. 이후 총학은 2013년을 지나 2014년인 지금까지도끊임없이 오바마홀 무료 개방을 외쳤으나 여전히 요구하고 있을 뿐, 진척은 없다.
주요 줄거리2
2013년 가을, 아무도 선본으로 등록하지 않아 무산된 총학생회 선거 이후, 비대위가 세워질 것이 확실시 됐다. 그러자 중운위에서는 총학생회 학생회칙의 ‘제 6-1절 비상대책위원회’ 개정이 발의됐다. 당시 학생회칙에 따르면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 및 부위원장은 오직 다음연도에 임기가 있는 중앙운영위원 중에서만 선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특정 단대장이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겸임하게 되며 업무 처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실제로 47대 비상대책위원회장 김범은 국제학부 학생회장으로서, 비상대책부위원장 이민영은 법대 학생회장으로서 동시에 일해야 했기에 그 둘에게 집중된 업무 부담이 심했다. 결국 중운위에서 발의된 해당 학생회칙은 전학대회에서 전면 개정됐다. 여기서 개정된 학칙을 잠깐 보면,
제6-1절 비상대책위원회
제38-4조(위원장과 부위원장) (개정 2013.11.25.)
제1항 비상대책위원장 및 부위원장은 비상대책위원들의 간선투표로 선출한다.
제2항 비상대책위원장 및 부위원장 후보는 비상대책위원회가 한국외대 총학생회 정회원중에서 선정한다. 단, 비상대책위원도 후보가 될 수 있다.
제3항 비상대책위원회는 1차회의에서 위원장 및 부위원장 후보를 선정하여야하며 2차회의에서 간선투표로 선출한다.
비대위장 및 부위원장의 후보 선정 범위가 중운위에서 전체 학생 대상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 후 간선투표에서 총학생회장이었던 조봉현이 비대위장으로 선출됐고, 사건은 시작됐다.
학교 측은 전 총학생회장이 비대위장을 맡은 것이 선례가 없다는 것을 구실로서울캠퍼스 대표자를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 회의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게다가 해당 학생회칙을 ‘절차상 하자가 있는 학생회칙’이라 문제삼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회칙 개정 권한은 오직 학생들에게만 있으며 이 과정에 대해 학교가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오히려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비대위는 학생 대표자 없는 등심위를 비판하고자 겨울방학 중임에도 대표자 지지 서명을 받아 총장실 앞 벽을 도배하고(겨울방학 중임에도 700여명의 학우들이 지지 서명 란을 빼곡히 채웠다), 학생 권리 장례식을 열었다. 우리학교에서 엄숙히 진행된 학생 권리 장례식은 인터넷 언론 매체들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가며 결국 경향신문 1면에 실리는 기염을 토했다.
사건이 이 지경이 되자, 의외로 학교의 마음을 돌린 것은 교육부였다. 당시 비대위장이었던 조봉현 군은 “기본적으로 등록금 인하나 동결을 표방하고 있던 교육부가 학생 대표자 논란을 일으키며 등심위를 제대로 열지 않는 우리학교에 압박을 가한 것”이라 설명했다. 마침내 학생 대표자는 대표자의 지위를 인정받고, 2월 4일(화) 등심위는 무사히 열려 등록금은 동결로 확정됐다.그러한 경험 때문일까, 조봉현은 비대위장 임기 종료 후 독립언론인 <외대알리>의 편집장이 되었고 <외대알리>의 제일 인기 많던 코너 ‘이무너 시리즈’를 전담했다. 물론 이무너 시리즈가 학생회와 학교, 학사정책 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교지의 해당 기사를 리메이크하고 있는 기자도 모르겠다.
강유나 기자 yoonah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