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개강을 앞둔 성공회대학교 학부 신입생 단톡방에는 매년 어김없이 '평등 약속' 혹은 '인권규약'이란 글이 공유된다. 젠더, 나이, 외모, 계층, 종교 등에 있어서 수평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는 안내문이다. 뿐만 아니라 입시 과정에서도 흔치 않은 대안학교 전형이 존재하는 등 신입생들은 성공회대 입학과 함께 진보적 가치가 담긴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공회대는 어쩌다 진보적인 학풍을 갖게 되었을까? 회대알리는 성공회대에서 25년 넘게 재직 중인 김진업 교수에게 성공회대가 '진보 대학교'가 되는 과정과 성공회대의 ‘진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성공회대에 재학 중인 김재성(사회융합자율학부 19), 변주연(사회융합자율학부 18) 두 학우가 마주한 성공회대의 진보적 학풍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성공회대 진보적 학풍은 교수에서 시작됐지만 이끌어 나가는 것은 학생”
사회융합자율학부 김진업 교수는 성공회대가 종합대학교로 전환된 1994년, 사회학과 설립과 함께 성공회대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故 신영복 교수와 20여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성공회대의 학풍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Q. 본교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다. 성공회대가 진보적 학풍을 갖게 된 과정을 설명해 달라.
(원래) 신영복 선생님과 이재정 총장(현 경기교육감)님이 계시던 조그마한 신학교였다. 그 당시에 이미 이재정 교육감님이나 신영복 선생님이 진보적 인사로 알려져 있었고 두 분이 신학교를 종합대학교로 만들자고 뜻을 모아서 종합대학 성공회대학교가 만들어졌다.
어떤 분들을 교수로 채용할 지 고민 중이었는데 당시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감옥까지 다녀오는 경우가 있어서 대학에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민주주의와 진보를 지향하는 새로운 대학을 만들려는 신영복 교수님과 이재정 총장님이 민주주의를 외치고 반독재에 투쟁하는 지식인들을 채용했다. 자연스럽게 성공회대는 우리나라 90년대 시대상황에 저항하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대학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Q. 성공회대의 ‘진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크게 보면 진보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변화다. 죽어 있는 우주조차도 가만히 있지 않고 진화한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변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더 나은 변화를 진보라고 얘기하는데 더 나은 변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그 방향을 현대용어로 바꾸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성별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회대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Q. 성공회대의 ‘진보’가 앞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른바 ‘예전 사람’들은 (진보를)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시대상황이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서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걸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20~30년 전에 ‘진보’, 그러면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우는 것이었다. 근데 지금의 ‘진보’, 시대 정신은 성차별을 줄이는 게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는 거다. 대통령 직선제 등이 과거의 시대정신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종류의 시대정신들이 요구되고 있다.
성공회대에 20년 넘게 있으며 깨달은 것은, 성공회대의 진보적인 움직임의 주체는 (교수가 아니라) 오히려 학생들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기성세대를 뛰어넘어서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한다. 예컨대 소수자 운동에 대한 얘기들도 학생들이 더 강하게 얘기하고 있고, 환경 문제나 생태 문제에서도 교수들보다 앞서서 얘기하는 것들을 발견했다.
성공회대의 진보적인 학풍은 교수들이 문을 열긴 했지만 그걸 계속해서 끌고 나가는 건 학생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큰 틀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지켜져야 되겠지만 구체적인 민주주의의 내용은 현재 시대를 살고 있고 이 학교에서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진업 교수는 성공회대의 진보적 학풍은 교수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성공회대가 종합대학으로 전환되던 시절의 시대정신이었던 ‘반독재’가 그 내용을 채웠다. 하지만 이젠 학생이 주체가 되어 이끄는 진보적 학풍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그 내용도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성공회대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학교의 학풍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회융합자율학부 학생회를 비롯해 다양한 학생사회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변주연 학우(사회융합자율학부 18)와 정의당 서울시당 학생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김재성 학우(사회융합자율학부 19)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젠더, 환경, 불평등 등 변화하는 의제 빼놓고 더 이상 진보를 논할 수 없어”
Q. 성공회대의 학생사회 문화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다른 학교와 차별점이 있는가
변주연(이하 변):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친구가 말해주기를 옆반에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반말을 하며 무례하게 말씀하신 것을 듣고 한 친구가 일어나 정중하게 지적을 드렸고 다른 학생들도 거기에 연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권위주의를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학생과 교수 간에 있는 권위에 대해 지적한 거다. 정규 고등학교 과정만을 거쳐온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부당함에도 누군가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모두가 다같이 연대하는 것들이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도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집회로도 나타났고. 그런 것들이 확실히 다른 학교 학생들과 이야기했을 때 신기해하는 부분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 학우들과 이야기를 할 때 누군가를 소외시키지는 않았는지 내부적 성찰이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평소 평등과 인권에 대한 이야기, 진보적 의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많이 느낀다. 이야기를 다 나누고 났을 때 항상 그 이야기가 끝나면 모임이 생겨나고, 집회가 이루어지고, 세미나가 기획되고, 텀블벅 후원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어떤 교수님은 직접 후원주점을 열기도 하시는 등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 일상의 작은 것을 바꾸며 서로 나누고 항상 실천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진보적 가치가 아닐까.
학교를 다니면서 인상 깊은 집회들이 많았다. 예전에 학내 익명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혐오발언들에 대항하며 정말 작은 인원에서 시작된 평등을 외치는 집회에 많은 외부 연대가 이어졌다. 청소 노동자 해고에 맞서서 학생들이 연대해 장기간 싸운 투쟁에서 이 분들의 해고를 우리 일상과 연관 짓고, 연민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등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되게 놀랐던 것 같다.
김재성(이하 김): 성공회대 학생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함'이 아닐까… 다른 학교의 사정까지 우리 학교만큼 잘 알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편협한 시선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학교의 경우 ‘진보적’ 가치나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적은 탓인지 학생회를 들어가거나 시민사회 활동가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성공회대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도 다른 방향으로 자기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활동가나 학생회 간부가 되지 않더라도 글로써, 음악으로써 학생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애오라지나 아침햇살 같은 동아리들처럼 말이다.
Q. 성공회대의 ‘진보’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변: 김진업 교수님 말씀처럼 더 이상 독재정권에 맞서는 거대담론만 붙들고 있는 진보는 아닌 것 같다. 젠더, 환경, 소수자 등의 문제로 많이 옮겨 갔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앞서 말했다시피 서로의 권력적 위치를 인지한 채로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거기서 나눈 대화들이 실천적으로 이어지는 그런 가치로서의 진보를 성공회대에서 많이 경험했다. 조금 더 약한 이들과 계속 연대하는 방향으로. 아무도 듣지 않는 약한 이들의 서사를 계속 엮어 내고 그럴 힘을 기르게 해 주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언제까지 성공회대가 '진보'로 남아있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든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시대의 종말을 마주했다고 생각한다. 성희롱에 대한 최초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낸 인권변호사가 위력에 의한 성비위를 저지르게 되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수십년간 소위 '진보'를 지탱해왔던 반독재, 그러니까 '민주'도 기득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반독재와 민주 이외에도 노동, 생태, 여성과 같은 새로운 가치를 통하여 '진보'가 무엇인지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사회학부 모 교수의 박 전 시장과 관련한 페이스북 게시글이 학생사회 안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그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른 교수들에게까지도 유감스럽다는 여론도 있었다. 이전에 '진보적' 교수와 학생 사이의 갈등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는 더욱 가시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냉정하게,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진보'는 독재체제에 반대하기 위한 일종의 '안티테제'에 가까웠다고 평가하고 싶다. 앞서서 노동, 생태, 여성이 앞으로의 '진보'를 채울 새로운 가치여야 한다고 설명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실천적 고민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변: 소수자, 젠더, 환경, 불평등 등 변화하는 의제를 빼놓고 더 이상 진보를 논할 수가 있겠는가 싶다. 없을 것이다.
‘진보 성공회대'라는 버스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정류장을 지나쳤다는 점에 대해 세 참여자 모두 이견이 없었다. 그 사이 버스의 운전대는 교수에서 학생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새 운전사들은 젠더, 노동, 환경 등 새로운 의제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 다음 정거장이 어딘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진보 성공회대' 버스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을 종점을 향해 계속해서 달린다.
*해당 기사의 내용은 인터뷰이 개인의 생각을 담고있으며 회대알리의 입장과 무관합니다.
글=엄재연 기자(eomzkxm@naver.com)
취재=방의진 기자, 엄재연 기자, 용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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