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6 (화)

대학알리

알리가 본 세상

비건 테라리움

우리가 그리는 공존의 미래에 대해

 

도시 중심부의 M사 햄버거 체인점 

 

 새벽과 아침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부지런히 집 밖을 나서지도, 멍청히 침대 위에서 머물 수도 없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선호하든  간에 잠깐의 스트레칭과 명상, 옷을 다려 입는 최소한의 의식을 끝마치고 나면 비로소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시간이 된다. 발붙일 곳 없는 이 바쁘고 비싼 도시에 자리한, 재개발 직전의 낡은 아파트 단지에서  두 블록 정도 걸어가다 보면 붉은 간판, 붉은 인테리어로 꾸며진  한 햄버거 체인점이 등장한다. 통유리로 마감된 이 가게는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이른 시간이지만 가게 안에는 직장인들이 가득하다. 하나같이 피곤함에 찌든 표정이다. 다들  베이컨을 끼운 머핀이나, 시럽에 절인 팬케이크 따위를 먹고 있다. 나 역시 문을 열고 들어가 메뉴를 본다… 되도록이면 고기는 없는 것으로... 잠시 키오스크 앞에서 고민하다가 팬케이크와 해쉬브라운, 그리고 커피를 주문한다. 종이 빨대인데, 괜찮으세요, 하고 점원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기계에서 두어 발짝 물러선 뒤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문득,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아득한 과거로부터, 어쩌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이 모든 과정이 이미 사무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도망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낀다. 도망, 도망이라. 어디로? 나는 제일 먼저 고향 선산을 떠올리며, 겨울 논밭의 거친 짚풀들과 온종일 비벼댄 바람이 맨살에 닿는 감촉이 어떨지 상상했다. 분명 아직은 몹시 차갑고, 따가울 거야. 그리고 논 근처에 소 키우는 곳이 있었는데, 그걸 뭐라고 하더라,  돼질 키우는 곳은 양돈장이고 닭은 아마 양계장이었지. 양우장이라는 표현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 그렇지, 외양간. 그거보다 좋은 표현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데 갑자기 도망이라니? 무엇으로부터?

 

  턱과 턱이 맞부딪혀 나는 쩝쩝거리는 소리와 커피를 홀짝거리는 소리, 트레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주방의 기계가 윙 돌아가는 소리만이 레스토랑을 가득 메운다. 집중하자, 정말이야, 무엇으로부터 도망가야만 하는 거지? 순간 그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마이크로 증폭된 남성의 음성이 갈고리처럼 공기에 박혔다. 132번이요, 132번, 팬케이크와 해쉬브라운 주문하신 분, 132번이요. 눈이 떠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이 카운터에 트레이를 놓고 떠난다. 카운터는 붉게 칠해져 있었고 매끄럽게 광이 났다.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잠깐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 없다. 찝찝한 기분을 삼키고 가게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빈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기억해 낼 필요 없어. 어쩌면 내가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실은, 꿈을 꿨던 내가, 붉은 트레이를 들고 서성거리는 나를 기억해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나는 무의식 중에, 이곳이, 아주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비거니즘과 지속 가능성

 비거니즘은 동물을 착취해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동물권 실천의 한 분파이다. 비거니즘을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죽 제품을 거부하는 것,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동물실험이 행해진 약을 구매하지 않는 것 등등, 공생의 원칙에 어긋나는 소비 행태를 지양하는 일이 비거니즘의 큰 틀이다. 이러한 비건 행위는 선택적으로 수행된다 하더라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비거니스트 열 명이 완벽한 비거니스트 한 명보다 낫다는 유명한, 동시에 꽤 활동가다운 농담이 이를 변호한다. 선택적인 비거니즘 수행은, 최종적으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살해당하는 동물의 총량을 줄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비거니즘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논-비건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회용품을 소비하되 육식은 하는 자들, 그 반대, 혹은 그 속에서도 닭과 돼지는 먹되 소와 개는 먹지 않는 선택적 비거니스트들은 주로 ‘위선자’ 라거나 ‘모순에 가득 차 있다’ ‘교조적이다’ 라는 비난에 직면한다. 이러한 비난들은 그다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나, 현실의 비건 논의들은 실제 이런 혐오들과 맞부딪혀 가며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맞물림, 혹은 마찰이 빚어내는 결과물이 결코 비거니즘에 유효한 방식으로 작동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비거니즘에 대한 혐오들이 영성적인 것으로서, 현재의 비거니즘 논의들이 합리적인 것으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생태계 시스템의 파괴가 우리에게 어떤 끔찍한 악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동물이 인간과 유사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는가? 비거니즘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납득 가능한 답을 내놓는다. 그러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 이 담론이 아주 이성적인 합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작게나마 참여하지 않으면 과학적으로 우리는 이 생태계 시스템과 함께 절멸할 것이고, 계급 고하에 상관없이 최종적으로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점에서, 생태주의의 실천 양식인 비거니즘은 윤리의 영역이다. 비거니즘은 선함의 윤리에 천착하여 대중에게 스스로를 하여금 ‘아, 해야 하긴 하는데, 제가 모자란 탓이죠’ 정도의 감상으로 남기고, 자의식이 강한 누군가마저 원색적인 혐오를 뱉어내게 하는 데 고작일 정도로 합리적인 윤리관으로 작동된다. 그러나 비거니즘이 소비의 양태에 밀접하게 달라붙어 있는 실천적 담론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소비는 합리성의 화신이자 물화의 양식인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비거니즘의 미래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거니즘은 결국 ‘지속 가능한 소비가 가능한 양식’ 으로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생태주의와 영성, 지속 가능성

 

 자연에 대한 지속가능성의 필요성은 1800년대 뉴잉글랜드 지역의 초월주의 운동을 통해 미국에서 처음 표현되었다. 특히 초월주의자였던 월도 에머슨은 ‘초월론자는 모든 것이 영적인 교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기적을 믿고, 빛과 힘이 유입되도록 인간의 마음이 늘 열려 있다고 믿으며, 영감과 희열을 신봉한다.”

(안드레스.. R. 에드워즈, 지속가능성 혁명)

 

 자연은 인간의 교사로서, 인간은 자연에게 삶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기에 자연은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이들 초월주의자들은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자연에 대해 역설한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의 한 분파로서 분류된다. 그러나 초월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자원이 아니었으며, 신비한 초월적 삶을 가지기 위한 영성적인 교사에 가까웠다.

 

 반면, 자연을 자원으로서 생각하고, 이 자원의 오염 및 고갈이 인간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관점은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중반에 등장했다. 1962년, 미국의 자연주의자인 레이철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 은 유해 물질과 오염 물질이 어떻게 자연을 황폐화하고 나아가 인간을 위협하는지에 대해 묘사했다. 이로써 생태주의는 윤리의 범주에 오르게 되었고, 이는 영성적 초월주의와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입장이다. 동시에 개념적으로 흐릿했던 지속가능성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도 이즈음이다. 자연을 교사로 보는 영성적 움직임, 삶의 지평선 너머를 탐구하는 구도적 자세로서의 지속 가능성 담론은 비이성적이고 무가치하다는 점에서 구시대적이거나, 혹은 너무 앞서 간 탓에 대중적 공감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내가 이 글에서 초월주의에 대해 간단히 서술할 수 없듯, 초월주의는 일종의 철학적 층위에 머물렀기에 끝내 “잘 팔리는 것” 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침묵의 봄’ 이후의 지속 가능성 담론은 우리 삶을 겨냥하는 실제적인 위기에 대해 맞서기 위한 방법론이자 구원론을 제시했다. 이 담론의 정치성은 고전적이고 단순한, 동시에 효과적인 삼단논법으로부터 나온다. (1. 인간은 자연이다. 2.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3. 그렇다면 인간도 파괴된다.) 이 인과적 당위성의 간단명료함은 대중의 정치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주의 그 자체를 ‘윤리’ 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이다.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도 반드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무너지지 않는 사회, 안전한 사회, 풍족한 사회에서의 삶, 인간 사이의 권력관계와 스스로에 대한 윤리적 자기 감시가 인간의 삶을 지속하게 한다. 그러나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들을 배제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지속 가능한 사회는 지속 가능한 생산을 의미하며, 이는 곧 지속 가능한 소비와 연결된다. 

 

“생명의 소유 개념을 바꿔놓은 생명공학이 나타나기 전까지 동식물은 특허제도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기술의 등장으로 생명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유전자 분리와 조작의 가능성은 유기체를 유전적인 구성 소로 환원시켰다. 생명에 대한 독점권은 유전자를 조작하는 신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 페미니즘)

 

품종개량의 역사는 최근 몇 세기 서구 과학자들의 노력에 더해, 근본적으로는 수천 년에 걸친 농경 사회의 인류가 이룩해 낸 것이다. 구성원들을 안정적으로 먹여 살려서 무사히 번식시키기 위한 고대의 농작물 재배는 표현 그대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영리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특허제도와 거대 농경작 기업의 등장, 고도화된 윤리적 소비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바나나 이야기


“현대의 식물재배는 일차적으로 시장성에 장애가 되는 생물학적 요인들, 즉 재생하고 증식하는 내재적 능력을 종자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에코 페미니즘)

 

 이제는 시중에서 살 수 없는 그로 미셸(Gros Michel) 품종 바나나는 현재 우리가 바나나를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캐번디쉬(Cavendish) 품종의 조상이자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백 종의 바나나의 한 종류이다. 여기서 조상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같은 계통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1960년대 캐번디쉬 바나나가 ‘발명’ 되기 이전에는 그로 미셸 품종의 바나나가 일반적이었다. 그로 미셸은 높은 당도와 두꺼운 껍질로 말미암아 장거리 운송이 가능하여 높은 상품가치를 지녔지만,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위해 한 그루의 뿌리를 잘라 옮겨심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바나나 전염병인 파나마병이 발병했을 때 대부분의 그로 미셸은 집단 폐사했고, 이후 현재의 바나나인 캐번디시 바나나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비록 캐번디시는 그로 미셸에 비해 당도와 향 모두 떨어진다고 알려졌지만,  동시에 선천적으로 파나마병에 면역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지금까지 계속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파나마병을 일으키는 푸사리움(Fusarium)의 변종 곰팡이인 TR4 탓에 다시금 활발히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캐번디쉬 바나나는 지난 30년 동안의 대량재배로 유전적 다양성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진 상태인데, 이런 상황에서 변종 파나마병이 유행할 경우 바나나 산업은 큰 타격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생태학자들은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나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바나나 종의 다양성을 저해시키는 대형 농장의 규모를 축소하고 바나나의 다양성 있는 생육환경을 회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마이크로바이옴(mircobiomes) 라 불리는 또 다른 곰팡이를 바나나 내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나나는 TR4에 대한 내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형농장의 규모를 축소하라는 비상식적인 요구 대신 두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바나나 산업의 이면에 얽힌 이해관계들은 결코 종의 다양성을 위한 자리를 내 주지 않는다. 과학적 해결 방법의 등장으로, 이제 기업은 바나나의 유전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음과 동시에 성공적으로 그들의 농경지를 넓혀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매년 바나나 농장은 거대해지고 있어서 2000년 대비 2015년의 바나나 생산량은 약 72.9%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품종 개량 식물을 사용한 대규모 농작은 언뜻 그 무엇도 파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은 경작지가 없는 푸른 정글 세계에서  격리된 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반대편이 아닌 이곳에서 행해지는 식물 개량과 대규모 농작은 그들에게 어떤 피해도 끼칠 것 같지 않다. 거대 다국적 식품회사인 돌(Dole)의 홈페이지 배너에서는 드넓은 대자연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이 먹거리가 자연으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돌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평선이 보이는 푸른 밭과 농부들의 순수한 노동, 그 이면의 땅 속에는  21세기 최신 과학의 산물이 잠들어 있다. 최신의 생물학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는다. 내게 이것은 농장이라기보단 공장에 가까운 이미지다. 대형농장 산업으로 말미암아 농약으로 매년 파괴되는 서울시만 한 크기의 녹지, 그곳에서 터전을 잡은 토착 식물과 동물들의 서식지 파괴는 고려되지 않는, 아직은 은폐된 영역이다. 

 

 어쨌거나 대형 농장의 농약 남용에 따른 환경 파괴와, 농장 확대로 말미암은 토착 동식물의 서식지 파괴 대신 다른 가시적인 문제들이 이야기된다. 이는 소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역인데, 돌과 마찬가지로 다국적 식품회사인 델몬트는  2019년부터 자사 과일의 포장지를 옥수수에서 추출한 자연 분해 필름인 PLA 소재로 교체했다. 윤리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이러한 방식이 장기적으로 이들 산업을 조금이나마 더 ‘지속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비자 해방과 행복의 나라 

 지속 가능성 운동에 천착한 현대 비거니즘은 소비의 행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리아 미스는 30여 년 전 발간된 그녀의 책 ‘에코 페미니즘’ 에서 이미 ‘소비자 해방’ 을 예언한 바 있다. 소비자 해방은 소비자들이 기존 서구 산업 국가들의 무분별한 소비주의 문화 대신, ‘지속 가능한’ 소비 패턴을 가지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21세기 들어 마리아 미스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생태주의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가장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는, 비거니즘이 소비로 수행될 때다. 특히 윤리적 소비는 지속 가능한 소비다. 소비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 그 효용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혹은,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망가트리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중요한 포인트다. 반면 소비하지 않음으로서 특정 산업을 도태시키는 것 역시 소비를 통한 비거니즘 실천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소비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 상품성 있는 것들, 효용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상품으로서 소개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소비의 사이클에서 가장 선명하게 문제시되는 것은 육식이다. 동물 도축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다. 몇몇 연구 결과는 지금처럼 소고기를 소비했다가는, 소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어마 무시한 옥수수 소비 탓에 결국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따라서 대체육과 배양육이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전자는 완전히 식물성 재료로 만든 것, 후자는 동물 세포를 배양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동물에게 어떤 고통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현재 대체육의 경우 맛과 질감에서 실제 고기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콩으로 만들어진 대체육은 비건들도 먹을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몹시 서글픈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대체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인가.

 최근 소비자들은  플라스틱, 비닐 등의 소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저렴하고 튼튼해 대량생산되는 이들 소재는 분해되지 않고 썩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분해되지 않은 미세 플라스틱이 인간의 건강에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이며,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먹이로 오인한 해양 생물들이 위가 파열되어 죽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분해 가능한 비닐 소재나 종이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특히 소비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는 데 적극 참여한다.   

 

 ‘깨풀’ 은 잡초의 일종이다. 살 수 없다. 파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필요로 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깨풀은 먹을 수 없고, 미관이 수려하지 못한데다가 잡초여서 인간이 심은 작물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알려졌다. 이는 깨풀이 생태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 외에도 한라솜다리, 콩짜개난, 석곡, 서울개발나물, 비자란 등등 수백 종의 (쓸모없는 멸종 위기종) 한국 토착 식물들이 있다. 이들은 소비의 사이클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육식, 채식, 그리고 플라스틱 포장지를 사용하는 기업들과 달리 지속 가능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없다. 

 이들이 소비의 사이클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결국 내 소비가 삶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내 소비가 나의 삶을, 그리고 인간의 삶을, 그리고 동물의 삶을 더 낫게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한라솜다리나 깨풀, 콩짜개난이 없어진다고 정말로 우리의 삶이 무너질까? 나는 토착 야생식물이 몇 종인지, 혹은 작년에 몇 종의 식물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환경식물과학 연구팀과 영국 왕실 식물원의 식물학자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1750년의 산업 혁명 이후 2019년까지 총 571종의 식물이 멸종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으로 이러한 멸종 속도는 산업 혁명 이전에 비해 500배 빠른 것이다. 산업화 사회 이후 식물종의 다양성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살아있고 또 어떤 식물이 영원히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이들 동식물은 나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소비의 사이클 바깥에 존재한다.  

 

 그래서 이게 대체 왜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도 동의한다. 무덤덤한 식물들이 사라지든 말든 우리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그런 풀 하나가 멸종한다고 인간이 멸종하는 건 아니니까.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에서 완벽하게 관리되는 수목, 인간에게 필요한 벌레들과 그 먹이들을 남길 수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서글프게 마무리

 나는 비거니즘이 지속 가능성 내에서 소비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히 그렇지 않은 것보다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동물의 고통을 줄인다. 더 이상 고통받는 동물이 생기지 않는 것, 그리고 고통받는 인간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소비가 동물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종이 빨대를 사용하고, 플라스틱 소비를 지양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건 수행이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이 이끄는 합리성이 비거니즘을 완전히 포섭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저항할 수 없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자연으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비이성적 영성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지속 가능한 환경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이 지켜야 할 가치에서 배제된 많은 동식물,.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의 구성원들은 사라질 것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실제로 사라져도 우리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싹 다 멸종한다면야 문제가 있겠지만, 한두 종 정도가 뭐가 대수일까?  따라서 이들은 아주 조용히 사라진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삶에서 이야깃거리 몇 개가 사라졌다고 할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대다. 다만 나는 조용하게 사라진,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의 구성원에 대해 조금 서글픔을 느끼는 것뿐이다. 

 

 분명 지속 가능성은 모든 문제의 답이 아니다. 더불어 지속 가능성이 환경 문제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등장할 경우  비거니즘적 가치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틈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소비를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이것이 유일한 실천 양식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요구된다. 소비만큼이나 보편적이고 필수불가결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무언가다. 나 역시 그 답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주 어렴풋하게, 우리에겐 아주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이곳은 아주 조용하다. 지속 가능성이 그리는 완벽한 사회를 상상한다. 최소한의 구성과 치밀한 계산으로 운영되는 생태계를. 그것은 아주 거대한 테라리움과도 닮아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는 필요한 모든 것이 적절한 위치에 놓여 있다. 쓸모없는 식물은 없다. 쓸모 없는 동물도 없다. 먹고 놀기만 하는 동물과 그것을 먹는 먹고 노는 동물은 모두 사라졌다. 인간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는 동식물이 살아남는다. 지속 가능한 소비가 그려내는 최고의 청사진이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귀여운 사막여우와 함께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을 걸어 다니는 나를 상상하는 것 뿐이다. 야생동물의 흉포함과 독풀 독성은 모두 제거되었다. 혹여 한 개체가 과하게 성장할 경우 인간이 조정할 수 있다. 그렇게 테라리움의 밸런스를 맞춰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나 조용하다. 또 매끈하다. 나무는 일정한 간격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꿈 같은 풍경이다. 나는 깨어나야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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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근 기자

문명을 야만의 이야기로, 빛을 어둠으로 거두고자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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