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외국어계열 유사학과(부) 구조조정에 관한 학칙개정안이 학교법인 이사회를 통과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이민지 총학생회장은 “서울캠퍼스 학우들이 졸속적인 구조조정을 반대하고 있음에도 납득 가능한 설명 없이 급하게 학칙개정안을 내놓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며 이사회 회의 당일까지 노숙농성과 대응행동을 이어갔으나 규정안 통과를 막지 못했다.
학생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학교의 결정은 ‘불통행정의 재등장’이라는 부정적 여론을 만들었다. 무리한 구조조정 추진은 반쪽짜리 정책에 불과했으며 학교와 학생, 학생과 학생을 갈라놓았다.
개정안 통과를 막기 위해 발빠르게 대응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는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학교를 만들고 학생 간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논의하기에 앞서 유사중복학과 구조조정 이슈가 등장했을 때부터 개정안이 통과되기까지 타임라인을 정리해 학교의 행동과 학생 측의 대응을 훑어보자.
<학제개편 타임라인. 그래픽=이승진 기자>
유사중복학과 구조조정 문제는 서울과 글로벌 양 캠퍼스가 통합된 2014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21년 말 총장 선거에서도 박정운 현 총장(이하 박 총장)을 비롯해 최종찬, 김용운 등의 후보자들이 학제 개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 총장은 당선 직후부터 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작년 12월 16일 박 총장은 최종 선임된 후 이사회 회의 정견 발표에서 “유사 중복학과를 통합해 캠퍼스 간 서열화를 해소하고 양 캠퍼스 특화 교육과정으로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3월 22일과 28일, 학생처장과 박 총장이 각각 글로벌캠퍼스 유사중복학과 학생대표자와 면담하며 구조조정안을 제시했다.
이후 4월 1일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가 ‘통번역대학 소속 전체 8개 학과와 국제지역대학 4개 학과(프랑스학과, 인도학과, 러시아학과, 브라질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폐과 존치 상태로 운영한다’는 내용의 구조조정안을 학생들에게 공지했다. 당일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글로벌캠퍼스가 공지한 구조조정안에 대해 학생인재개발처장, 기획조정처장과 면담을 진행했다.
이후 박 총장은 4월 4일 글로벌캠퍼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제개편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날 박 총장은 중복학과 학생들을 위한 보상안으로 8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학제개편 대상 학과에 대한 대책. 사진=유튜브 한국외대교육지원팀>
학생들과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위 구조조정안은 캠퍼스 간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학과 통합이 완료된 후부터 서울캠퍼스 학과명으로 졸업증명서를 발급한다’는 내용이 교내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서 논란이 됐다.
대책 발표 다음날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서울캠퍼스 학생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안에 대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677명이 참여한 설문에서 44.7%가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는 지난 3월 실시한 ‘2022 학생요구안 설문조사’에서 유사중복학과 통합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인 86.5%의 절반 수준으로, 학생 의견없이 결정한 조정안이 학생 여론을 바꿨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2 학생요구안 설문조사(왼쪽) / 4.5 긴급 설문조사(오른쪽). 그래픽=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4월 6일 유사중복학과 구조조정 관련 총장과의 공청회, 7일 필리버스터, 11일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총학생회는 학생의견 반영 없이 갈등을 조장하는 정책 결정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고 교육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후 구조조정추진위원회와 합동중앙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개정안의 수정 및 보완을 논의하고 규정안의 우려지점을 학교에 전달했다.
그리고 지난 19일, 교무행정팀과 전략기획팀은 외국어계열 유사학과(부) 구조조정에 관한 규정(안)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고했다.
<외국어계열 유사학과(부) 구조조정에 관한 규정(안) 제5조. 사진=한국외국어대학교 홈페이지>
수정된 규정안은 지난달 4일 박 총장이 제시한 규정안에서 ‘2개 이상 전공 취득 시 학위증과 졸업증명서에 명기할 전공명 선택 가능’, ‘부전공 및 이중전공 이수자가 추가학점(총54학점)을 취득할 경우 제1전공으로 인정’ 조항이 삭제되고, ‘이중전공 선발자 복수전공 신청 가능’ 조항이 추가됐다. 그러나 초기 규정안에서 양 캠퍼스의 갈등구도를 만든 ‘서울캠퍼스 해당학과(부)명의 졸업증명서 발급’ 조항은 그대로였다.
이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학생 요구안이 반영되지 않은 개정안에 대한 반대 기자회견을 22일 열고 수업권 보장을 촉구하는 학생 약 2,300명의 연서명을 총장실에 전달했다. 이어서 교무위원회-대학평의원회-법인이사회로 넘어가는 학교 측의 독단적인 학칙개정안 심의·의결을 막기 위해 집단행동(노숙농성, 교무위원회 입퇴장 행동, 대학평의원회 개회 저지를 위한 회의실 및 총장실 복도 점거, 법인이사회 회의 대응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규정안 철회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학칙개정안은 최종 가결됐다.
<총장실 복도를 점거한 학생들. 사진=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인스타그램>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사안에 대해 “앞으로의 집행 과정에서 세부 규정 논의에 학생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것을 학교 측에 요구했다”며 “11일 개최되는 총장과의 대화에서 학과 구조조정 및 학제개편 논의 테이블에 학생대표자를 참여시키는 것에 대한 확답을 받겠다”고 피력했다.
박 총장의 무리한 구조조정 추진은 돌이킬 수 없다. ‘불통행정의 재등장’이라는 부정적 여론을 전환하기 위해 학생들이 참여하는, 학생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박정준 기자(wjdwns357@gmail.com)
이승진 기자(lsg10227@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