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이 2월 24일부터 시작됐다. 행사는 3월 2일까지 7일간 진행된다. 2월 24일 ‘섭식장애 당사자-내러티브 탐구’를 시작으로 매일 저녁 7시 30분,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에서 섭식장애를 주제로 한 세션이 열린다. 섭식장애 당사자와 치료자, 연구자, 작가와 뮤지션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이 각 세션에 참여한다.
이번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 ‘잠수함토끼콜렉티브’와 인제대학교 섭식장애정신건강연구소가 주관한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이하 ‘잠수함토끼’)는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잠수함 속 토끼처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첫 회 인식주간의 슬로건은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이다. ‘잠수함토끼’의 일원 박지니 씨는 SNS를 통해 “섭식장애와 그에 얽힌 수많은 다른 주제들에 관해 더 많은, 더 깊고 더 열띤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개최된다는 소식에 국내외의 다양한 이들이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2월 24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독립서점 북티크에서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첫 번째 세션이 열렸다. ‘섭식장애 당사자-내러티브 탐구’를 주제로 섭식장애를 경험한 다섯 명이 모였다. 책 『삼키기 연습』의 저자이자 이번 인식주간을 기획한 박지니 씨가 참여와 진행을 모두 맡았다. 섭식장애 당사자이자 내러티브 탐구자로는 섭식장애를 겪은 유튜버이자 당사자 내러티브 연구자인 이진솔 씨,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의 주인공 박채영 씨, 책 『또 먹어버렸습니다』의 저자이자 섭식장애 상담사인 김윤아 씨,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송민 씨가 함께했다.
‘섭식장애 당사자-내러티브 탐구’는 당사자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다. 이후 △붕괴 △시행착오 △앎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붕괴’ 파트는 “현실에서 모든 경험은 지식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붕괴로 다가온다”는 한 외국 서적의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섭식장애 당사자가 각자 섭식장애와 관련하여 ‘붕괴’를 경험한 순간에 대해 나누었다.
‘시행착오’ 파트에서는 섭식장애라는 문제에 부딪히며 시도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박채영 씨는 “섭식장애는 신경정신과적 질환이긴 하지만 저는 이것을 억압된 것에 대한 몸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억압된 감정들이 몸으로 발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발화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날 억압했는가를 끊임없이 물었고, 무엇이 날 억압시켰는가에 대해서 질문했고.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라며 자신이 경험한 시행착오를 설명했다. 그리고 여전히 “매 순간 나는 왜 내 몸과 친하지 못한가. 왜 내 몸에밖에 화를 낼 수 없었을까. 나의 알 수 없는 분노는 어디서 온 걸까” 질문한다며, 이에 대해 답을 찾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앎’ 파트에서는 당사자들이 긴 기간 섭식장애를 겪으며 쌓아온 ‘앎’에 대해 나누었다. 박지니 씨는 “자기 몸에 불편감을 느끼는 건 거의 대부분의 여성분이 다 그렇지 않나요?”라는 물음을 던지며 섭식장애가 사회적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섭식장애를 ‘다이어트하다가 걸리는 병’으로 치부하는 인식에 대해 “사실 핵심을 꼽아보면 몸을 축소시키고 싶어 하고 몸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어떤 불편감이거든요. 그 ‘날씬함’을 이 사회에서는 ‘예쁜 거’라는 층위에서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층위는 다를 수 있어요”라고 생각을 밝혔다.
‘섭식장애 당사자-내러티브 탐구’ 시간을 닫으며, 박지니 씨는 “개개인을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한다고 섭식장애가 나아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사회적인 요소를 바꾸거나, 최소한 질문을 던지고 같이 논의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가 나아질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더하여 “섭식장애라는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았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증상을 겪었던 여성분들이 국내외로 많잖아요. 그런 식의 발화는 옛날부터 여성들이 항상 가지고 있던 거예요. 근데 그게 단지 예뻐지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위해서일까? (묻는다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저희가 경험으로 얻은 앎이고, 이 부분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섭식장애는 의학계의 진단명만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사회학, 인류학, 문학 등 여러 측면의 생각이 필요해요. 굉장히 흥미진진한, 우리가 다 같이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고민거리라고 생각해요.”라며 섭식장애에 관해 ‘납작하지 않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소감을 묻자, 서울에서 온 A씨는 행사에 오기 전에 본 박지니 씨의 인터뷰 기사를 먼저 언급하며 “프로아나* 문제나 관련 커뮤니티에 대해서 성급히 판단하고 (나와) 격리된 사람들로 인식했었는데, 그 문제가 나랑도 되게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답했다. 더불어 “몸매에 대한 강박 등이 내 안에도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 자체로 안게 되는 문제들이 있음을 언급했다.
또 “구분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되게 복잡한 마음이에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어쨌든 인식주간이잖아요. 인식을 하는 게 시작이니까. 고민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라며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마음을 밝혔다.
* 프로아나(pro-ana)는 ‘찬성한다’라는 뜻의 ‘pro-’와 ‘거식증’을 뜻하는 ‘anorexia’의 합성어로, 거식증의 몸과 증상을 동경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첫 세션을 앞두고 박지니 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모였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시간 안에 답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기존에 언론이나 의료계 중심 내러티브에서 나왔던 얘기를 반복하는 대신 우리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기 시작하면 다른 질문,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이런 행사를 마련하게 되었어요. 지금 이 시간이 더 좋은 질문들을 찾아내는 과정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처음 이틀은 종료되었지만, 앞으로 2월 26일부터 3월 2일까지 △우리의 가능세계 △사나운 애착과 여성의 수치심 △식사치료 ABC △섭식장애 치료의 현재와 미래 △절망 이후의 글쓰기 세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오프라인 참여 신청은 마감되었지만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하는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납작하지 않은” 이야기에 함께할 수 있다.
취재, 사진, 글 = 유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