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5 (금)

대학알리

엘리멘탈이 말하는 ‘K-장녀’의 존재

한국이 열광한 <엘리멘탈>


픽사가 새롭게 선보인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2023년 여름, 그야말로 독보적인 화제작이었다. 6월 14일 개봉한 이후, 현재까지 약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700만’이라는 수치를 돌파한 것은 독보적인 기록이다. 디즈니의 '겨울왕국2' 개봉 이후 최초다. 외신은 ‘엘리멘탈’의 존재감이 한국에서 더욱 빛났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관객들이 ‘엘리멘탈’에 열광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적 정서’다. 엘리멘탈의 제작을 총괄한  피터 손 감독은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1970년대,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고 살아온 부모님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 속에 녹여냈다. 적재적소에 담긴 자잘한 한국적 요소들은 한국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공감을 끌어냈다.

 


유독 한국에서도 20대 여성이 ‘엘리멘탈’에 애정을 표한 점이 흥미롭다. CGV의 집계에 따르면 엘리멘탈을 예매한 관객의 69%는 여성이었고, 세대별로는 20대가 38.5%로 1위를 차지했다. ‘엘리멘탈’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원소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로, 상반되는 속성을 지닌 ‘불 여자’와 ‘물 남자’의 모험과 로맨스가 그 중심에 있다. 하지만 20대 여성들은 ‘엘리멘탈’에서 다른 이야기를 읽어냈다. 바로 불 여자인  딸 ‘엠버’의 서사다. 가부장적 질서 아래 갈등하면서도 부모님의 희생에 부채감을 느끼며 ‘착한 딸’로 살아가는 엠버의 솔직한 내면에 공명한 것이다. 매번 따듯한 가정과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던 디즈니이기에, ‘엘리멘탈’이 보여준 ‘불 속성 효녀’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엘리멘탈에 녹아든 ‘유교’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 ‘유교의 향기’를 느꼈다면, 틀리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엘리멘트 시티에 새로운 터전을 꾸린 엠버의 부모님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파이어 타운에 작은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 가게를 딸 엠버가 이어받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은 ‘이제는 은퇴를 하고 싶으니, 딸인 네가 어서 준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부모님의 꿈은 때로 억압이 되기도 한다. 가정이 정하는 룰은 아름다운 질서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족쇄처럼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엘리멘탈에는, 그 꿈 아래 갈등하며 살아가는 ‘엠버’가 있다. 사소한 일에 발끈하곤 하는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을 거부하지 못한 채 속에 화만 쌓였던 ‘외동 장녀’의 삶을 대변한다. 엠버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담과 피로를 느끼면서도 ‘자신을 위해 온 삶을 바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착한 딸'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한 딸이란, 부모님이 원하는 삶에 충실한 존재다. 그 프레임에서 벗어 나는 건, 도덕성을 떠나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래서 엠버는 무의식적으로 ‘효녀’의 길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 마음을 부정하고 자책한다. 엠버는 자신의 가정을 사랑한다. 늙어 가는 아버지는 애틋하다. 어서 더 훌륭한 어른이 되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픽사는 이렇게 부모님의 은혜와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딸들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발화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엠버의 ‘유리 공예’라는 고유한 재능을 보여주며,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욕망하는 멋진 '불효녀'들의 삶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착한 딸로 살지 않아도 괜찮아! 대한민국의 딸들이라면 누구나 빠져들 이야기다. 

 

 

엘리멘탈, K-장녀를 조명하다


엘리멘탈을 시청한 20대 여성, 특히 ‘장녀’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에 재학 중인 24세 ‘K씨’를 만났다. 그는 집안의 첫째 딸로, 두 살 어린 동생이 있다. 


K씨가 엘리멘탈을 관람하게 된 큰 이유는 ‘독특한 소재’였다. “개인적으로 디즈니, 픽사의 영화들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현실과는 거리가 멀고 제작진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들에 끌리는데요, 이런 취향이 ‘엘리멘트 시티’로 저를 이끈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원소들이 공존하는 도시라니, 너무 매력적인 소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보며 어느새 ‘엠버’와의 교집합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저는 엠버의 희생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엠버만큼 가족에 애틋함을 느끼는 편도 아니고, 하고 싶은 건 어떻게 해서든 다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웃음) 하지만 엠버에게 정말 많이 공감했고, 마지막에 엠버와 엠버의 아버지인 ‘아슈파’가 맞절을 하는 장면에 서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도 부모님께 부담이 될까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말씀 드리지 못했던 적이 있고, 최대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입니다. 엠버 역시 가게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한참을 망설였던 저를 겹쳐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엘리멘탈’이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불완전이 완전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엠버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갉아 먹었지만, 그걸 벗어나 스스로의 꿈을 위해 한 발 내딛는 서사는 그녀가 성장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장 서사를 여성캐릭터를 통해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많은 여성 관객이 호감을 표했다고 생각합니다. 엠버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닮아있는 데에서 오는 공감을 넘어,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성장을 담은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작년에는 K-장녀를 주제로 칼럼 과제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는 ‘K-장녀’라는 개념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저는 ‘K-장녀’라 하면 ‘책임감’이 가장 많이 떠오릅니다. ‘너 보고 동생(들)이 배운다’, ‘엄마 아빠 없으면 네가 동생의 엄마다’, ‘네가 길을 잘 닦아놔야 동생(들)이 그대로 따라간다’ 같은 말들, K-장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 아닌가요? 이런 말을 듣고 자란 탓에 ‘K-장녀’는 맡은 바를 반드시 다 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잘’ 해내야 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커요. 그리고 실제로 제가 겪어 온 저와, 제가 만나온 K-장녀들은 대부분 책임감이 큰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K-장녀 레이더 마냥 또 다른 장녀들을 곧바로 알아채곤 합니다.” 그는 밖에 나가면 세상만사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을 희생하는 데 충실한 딸들의 모습을 금방금방 알아챌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엠버’의 캐릭터가 한국의 딸들과 공유하는 특징이 ‘참을성’이라고 짚었다. “극 중에서 엠버는 화를 잘 참지 못합니다. 무리한 요구를 서슴없이 하는 손님을 참다못해 가게를 태워 먹기도 하고, ‘레드닷 세일’ 때는 밀려드는 손님들을 받아내다가 화가 터져 집의 파이프를 터뜨리기도 하죠. 엠버는 스스로 이렇게 화를 낼 때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해 봐야 한다’, ‘참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설득합니다. 한국의 딸들은 대부분 집에서 한 번쯤은 네가 참아, 라는 말을 듣습니다. 동생이 있다면 네가 언니, 누나니까 참고 동생에게 양보하란 말을 듣고, 아빠와 싸울 때면 자식이니까 네가 참으란 얘기를 듣게 됩니다. 남들이 화를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딸들은 참으라고 세뇌당합니다. 이것 때문에 참다못해 감정이 터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엠버와 ‘아슈파’의 사이가 좋게 그려짐에도, 아슈파가 엠버에게 엠버의 화보다 손님들의 입장을 먼저 이해해 보라고 하는 말이 원망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극 중에서 엠버는 결국 부모님이 물려주는 가업을 거부하고 자신의 꿈을 찾아 여정을 떠난다. 이 모습이 어쩌면 ‘불효녀’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 엠버의 ‘착하지 않은 ’선택을 지지하게 되었을까. “저는 엠버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엠버는 지금까지 부모님이 일궈 오신 가게 ‘파이어플레이스’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엠버가 자신의 꿈을 좇아 파이어플레이스를, 부모님의 곁을 떠나는 이유는 엠버가 ‘불효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제는 자신을 위해 타오를 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엘리멘탈’ 같은 인기 애니메이션에 ‘딸’의 정체성이 부각되는 것의 의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가정 내 ‘딸’의 위치를 보면 영화 <엘리멘탈>이 세상의 모든 ‘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집니다. 대체로 ‘딸’은 가정 내에서 가장 약자입니다. 부모님보다 어리기에 저자세를 요구받고, 여자이기에 돌봄노동에 대한 기대치를 부여받습니다. 이는 가정에 대한 애정과 책임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잘 반영한 것이 영화 초-중반부의 엠버입니다. 어쩌면 수백 번 고민을 반복한 끝에 엠버가 자각한 사실은 다름 아닌 ‘나는 가게를 이어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엠버에게 곧 가게는 부모님이고, 가정이고, 집입니다. 그것을 평생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던 생각이 깨지면서 엠버는 방황합니다. 하지만 결국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부모님께 고백하게 되고, 꿈을 찾아 집을 떠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영화가 ‘딸’에게 강박에 메여있지 않아도 된다, 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영화 <엘리멘탈>은 세상의 딸들에게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엠버가 여성이자  ‘딸’로 그려져야만 했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엠버의 성장, 딸들의 성장

 

‘엘리멘탈’은 로맨스에 그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물 남성 웨이드’를 만나 ‘엠버’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1차원적인 이야기로 비추어질 수 있겠지만, 영화를 주도하는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엠버다. 영화의 전개는 내내 엠버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이루어진다. 부모님의 희생에 보답하려 스스로를 얽매던 모습과, ‘파이어플레이스’ 너머의 세계에 두려워하면서도, 모험을 통한 성장을 일구는 것도 엠버의 몫이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꿈을 따라 여정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에 무엇보다 여성 관객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딸’을 대변한 엠버의 이야기는, 스크린을 넘어 ‘딸’로 살아가는 많은 여성에게 위로로 다가갔다.  ‘엘리멘탈’은 갈등하고 망설이는 딸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그려내며,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누군가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는 응원을 전한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는 ‘참으며 살아가는 삶’에 익숙했던 여성들에게 큰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20대 여성들이 ‘엘리멘탈’의 흥행을 견인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서부터 온다. ‘엘리멘탈’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었기에.

 

영화사에서 남성 캐릭터의 성장과 모험 서사에 여성 캐릭터들은 쉽게 묻히고, 수단으로 소비되어 왔다. 혹은 ‘로맨스’의 한계에 갇혀, 남성 캐릭터와의 만남을 거쳐야만 구원이 가능했다. 하지만 ‘엘리멘탈’은 달랐다. 인간으로서의 ‘딸’, 즉 잊히고 억압받았던 많은 여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엘리멘탈’이 쏘아 올린 불꽃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진솔한 삶을 그리는 영화들이 새롭게 등장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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