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운영에 불만을 표한 게이머들이 서울 상공에 비행선을 띄워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1일 온라인 커뮤니티 ‘아카라이브 원신 채널’의 누리꾼들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일대에서 게임 개발사 ‘호요버스’의 게임 운영을 규탄하기 위한 비행선 시위를 진행했다.
길이 10m, 높이 3m에 달하는 비행선에는 ‘혐오표현 방치말고 개선의지 내비쳐라’, ‘뉘우쳐라 고객과의 소통없는 기업’이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이날 비행선은 11시30분부터 13시까지 약 1시간30분 서교동 일대를 비행했다. 서교동은 게임 원신의 개발사 ‘호요버스’가 운영 중인 건물 ‘티바트 타워’가 위치한 곳이다.
‘아카라이브 원신 채널’의 게이머들은 최근 발생한 ‘게임업계 남성 혐오 표현 파동’에 얽혀있는 호요버스가 유저와의 소통에 나서지 않자 이를 규탄하기 위해 비행선 시위를 추진했다. 지난달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 ‘스튜디오 뿌리’가 수주한 작업물에 남성 혐오 표현을 몰래 삽입했다는 의혹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불거졌다. 스튜디오 뿌리가 수주한 작업물은 주로 게임 업계의 홍보 영상이었다. 홍보 영상이 제작된 게임의 게이머들은 "(스튜디오 뿌리가 제작한) 영상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남성 혐오를 상징하는 손 모양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며 호요버스를 비롯한 국내외 게임사에 해명과 대응을 요구했다.
온라인 게임 ‘원신’의 게이머들은 게임의 캐릭터 디자인에 참여한 한국인 원화가가 과거 SNS에 남성 혐오 표현이 담긴 게시글을 게재했다며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신의 개발사 호요버스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게이머들 사이에선 개발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특히 지난 9일 호요버스가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한 ‘원신 4.3버전 특별 업데이트 방송’에서 한국 게이머들의 채팅창을 차단하며 개발사의 불통 논란이 확산했다.
주최 측은 이번 비행선 시위를 위한 모금에 약 2천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비행선 시위는 22일에는 호요버스 한국 지사가 위치한 사당역 일대에서, 그리고 23일과 24일에는 다시 티바트 타워가 위치한 서교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A씨는 “비행선을 통한 시위가 매우 독특하고 신선했다”며 “이런 행동이 이어져 유저들이 목소리를 내어 개발사의 돈통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고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우마무스메 마차 시위’처럼 우리도 특별한 선례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면서 이날 비행선 시위를 진행하게 됐다”며 “호요버스가 소통 개선의 의지를 내비치고 유저들과 양방향 소통 창구를 만들어 주길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호요버스 한국지사 관계자는 “여행자 여러분께서 보다 방송 자체에 집중하시길 바라는 차원에서 실시간 채팅창을 닫게 됐다”며 “이로 인해 불편을 느끼셨을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어 “실시간 채팅창을 다시 열고, 특별한 사유로 인해 채팅창을 닫게 되면 미리 공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에도 게이머들의 비판 여론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하나의 문화가 된 ‘트럭 시위', 적극적으로 행동 나서는 게이머들
“답이 없네, 트럭 보내자”
최근 게임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트럭 시위는 게임사에 대한 보편적인 항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트럭 시위는 LED 전광판을 탑재한 트럭에 메시지를 띄우고 도심을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많은 인력을 동원할 필요 없이 시위를 기획할 최소한의 인원만 필요하다. ‘총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커뮤니티 유저들의 모금을 받아 시위를 계획하고 진행한다. 모금을 비롯한 진행 과정은 커뮤니티를 통해 투명하게 공개된다.
트럭 시위는 일반인들의 이목을 끌기 쉽고, 언론의 반응을 이끌어내 여론의 주목을 모을 수 있다. 필요한 모금도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커뮤니티에서 손쉽게 이뤄진다. 또 복잡한 사전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할 필요도 없다. 주로 차 한 대로 이뤄지는 트럭 시위는 1인 시위로 분류돼 집회·시위 신고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트럭 시위는 다양한 장점과 함께 코로나19 사태가 맞물려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었다. 방역 당국의 집회 제한 조치로 인력을 동원한 집회가 어렵게 되자 트럭 시위가 새롭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각광받았다. 기존에 전광판 트럭이 많이 동원되던 정치계 외에도 연예, 게임, 스포츠 등 다양한 팬덤이 트럭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 광고용 트럭 업체 대표는 “코로나19 시기에 시위를 위한 트럭 대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며 “지금도 하루에 10대씩 꾸준히 수요가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게임 업계는 트럭 시위가 많이 이뤄지는 분야 중 하나다. 지난 2021년 넷마블이 서비스하는 ‘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운영 미숙으로 일어난 트럭 시위를 필두로 수많은 트럭 시위가 이어졌다. 게임 ‘마비노기’의 유저들은 문구를 랩핑한 버스를 운행하는 ‘버스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트럭 시위가 사회 각 분야에서 꾸준히 이어지자, 트럭 시위만으로는 시선을 끌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게이머들은 대중의 이목을 잘 끌 수 있는 수단을 도입하고 있다. 지난해 게임 ‘우마무스메 : 프리티더비’의 유저들은 게임을 서비스하는 카카오게임즈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에 마차를 동원했다. ‘우마무스메’가 경마를 소재로 한 게임이라는 점에서 고안된 아이디어였다. 이들의 '마차 시위'는 서울 도심에 나타난 마차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카카오게임즈와 간담회를 성사시키는 등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는 ‘콘텐츠산업 2022년 전망보고서’에서 “게임사, 콘텐츠에 대한 게이머들의 적극적인 집단 의사 표명이 ‘트럭 시위’라는 집단행동을 통해서 발현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트럭 시위로 보편화된 게임이용자들의 항의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게임콘텐츠의 결제구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의 표출로 볼 수 있으며, 향후 온라인게임 운영에 필요한 새로운 고민의 지점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한국게임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트럭 시위를 ‘게임 유저 항의 방식의 놀라운 혁신’이라고 표현했다. 위 교수는 “기존의 유저들은 게임 사이트의 Q&A 문의를 이용하거나 언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트럭 시위는 문제 제기를 하는 형태에 있어 하나의 혁신을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회사가 게이머들의 불만을 수용하고 어떻게 소통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이슈”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