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덕질을 한다. 내 친구의 지론이다. 나도 동의한다. 덕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아이돌은 물론 반려동물, 자식, 특정 분야의 학문 등 무언가에 빠져 심취하고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덕질’이라고 일컫는데 일체 부족함이 없다.
나의 경우는 포켓몬이 덕질의 대상이다. 다 큰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무엇이냐는, 성차별적이고 연령주의적 요소가 다분한 발언이 귀찮아 덕질을 잠시 쉬기도 했지만 현재는 그딴 관점에 기반한 발언이 하등 건강하지 않음을 깨닫고 당당히 덕질을 하는 중이다. 다만 연령주의와는 별개로 나이를 먹어가며 돈, 시간, 이동에 관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것이 내 풍요로운 덕질에 큰 공을 세웠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상기한 덕질을 잠시 쉰 기간, 일명 ‘휴덕’ 기간 동안 사지 못한 포켓몬스터 게임 중 몇 종이 단종되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전 알바로 번 돈을 사용해 웃돈을 주고 중고를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덕질은 훗날 ‘무인편’(AG, DP 등 시리즈 명이 붙지 않은 본편 애니 시리즈)으로 불리는 초창기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내가 처음 해본 포켓몬 게임인 ‘포켓몬스터 다이아몬드 펄’를 넘어, 휴덕 기간을 지나 현재 ‘포켓몬스터 썬 문’(이하 ‘SM’) 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아니 이건 방앗간을 찾아 간 거지.
4월 팝업스토어 공지사항 Ⓒ 포켓몬 페이스북
SM을 플레이하며 (좀 이상하다?) 하루하루 포켓몬을 잡아 도감을 채워가던 어느 날, 포켓몬 페이스북에 공지가 올라왔다.
포켓몬스터 한국 대표 선발 평가에 반영되는 대회가 열리는데 대회와 함께 미니 팝업스토어를 운영할 것이고, 거기에 기념으로 특별한 색 포켓몬도 배포한다는 내용이었다. 집에서 행사장인 판교까지 지하철로 1시간 30분이나 걸리지만 이 정도면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포켓몬 상품 상설 매장이 없다. 팝업스토어 개념으로 이벤트와 함께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한 상품이 단기적으로 노출되고, 스토어를 구성하는 상품도 자주 바뀐다. 스토어 방문을 결정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꽤 중요한 요소다. 안 그래도 귀여운 피카츄가 더 귀엽게 나온다니, 그것도 행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니.
행사는 이틀 동안 진행됐다. 첫째 날은 카드 대회가 열리고, 둘째 날은 게임 대회가 열리는 일정이었다. 특이 사항은 카드 대회에 참여하면 특별 카드를, 게임 대회에 참여하면 기념 와팬을 선착순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계획을 세웠다. 팝업스토어의 인기 상품은 분명 첫날에 매진될 터였다. 그리고 나는 마침 카드는 하지 않는다. 결국 이틀을 다 가기로 했다. 첫날에 상품을 사고, 둘째 날에 게임 대회에 참여하면 상품도 사고 대회도 참여할 수 있었다.
기념 와팬을 받으려 참가하는 거지만 이왕 대회이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대회는 최신 시리즈인 SM의 배경인 알로라 지방의 포켓몬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6년 10월에 발매된 게임이라 이전에 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고, 때문에 대회 선택도가 높은 포켓몬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직접 잡기도 했지만 GTS(Global Trade Station. 전 세계 이용자들이 서로 포켓몬을 교환할 수 있는 통신 시스템)를 사용해 급히 구하기도 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능력치까지 고려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구색은 맞출 수 있었다.
첫째날, 미니 팝업스토어
오픈 시간은 행사 장소인 현대백화점 개장 시간과 같은 오전 10시 30분. 정확한 장소는 10층 토파즈홀이었다. 분명 사람들은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7시에 일어나 정갈한 마음으로 샤워를 했다. 출정식의 마음으로, 세례를 받듯 물을 맞았다. 늦으면 얼마를 기다려야할지 몰랐다. 7시 20분, 식사를 하지 않는 대신 두유 두 팩을 가방에 챙겼다. 몸을 실은 지하철이 판교역에 도착한 시각은 9시. 1시간 30분이나 일찍 왔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리며 몇몇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동지애가 느껴졌다.
1층부터 출발하면 엘리베이터 경쟁이 치열할 것 같아 판교점의 구조를 사전에 파악해 놓았다. 어플을 통해 각 층의 구조를 확인했다. 그 결과, 5층 CGV는 백화점 영업시간 전에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5층부터 10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것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역에서 바로 5층을 향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화관과 백화점 매장을 연결하는 통로는 셔터로 차단되어 있었다. 10시 10분부터 셔터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셔터 뒤로 안전관리팀 직원들이 보였다. 좀비 영화 생존자들의 시점이 저 분들이 우리를 보는 시점과 일치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은 걸려 넘어질 우려 때문인지 소파를 치웠다.
모여있던 소파를 양 옆으로 치워주셨다. 감사합니다. Ⓒ 박재연 기자
10시 30분이 되자 셔터가 올라왔다. 직원들이 뛰지 말라 당부했지만 한 사람이 뛰기 시작하자 모두가 뛰기 시작했다. 나도 뛰었다.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나는 내가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지 몰랐다. 직원들이 일정 간격으로 서서 뛰지 말라고 외쳤지만 모두 그 때만 속도를 조금 낮출 뿐이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던 직원은 위험하다며 뛰지 말라고 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뛰지 마세요, 뛰시면 안 돼요, 아아…….” 그 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양 팔을 벌려 최대한 질서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그 때는 죄송했습니다.
판교 포켓몬 미니 팝업스토어 진열대. 피… 피카츄! Ⓒ 박재연 기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0층에 도착한 뒤 1시간을 또 기다려서야 스토어에 입장할 수 있었다. 기다리면서 상품 몇 개가 매진됐다. 조바심이 났지만 목표로 했던 상품을 사는데 무리는 없었다. 승리감에 상품들을 결재했다.
이후 특별한 색 포켓몬을 받은 뒤, 카드 대회장 뒤편에서 진행되던 카드 규칙 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내 첫날 일정을 마쳤다. 여담이지만,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평균 연령은 나를 제외하고 6살이었다.
둘째 날, 게임 대회
둘째 날도 같은 경로를 통해 5층까지 들어왔다. 첫째 날처럼 신발끈을 묶고 있는데 셔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미리 행사장까지 이동하겠습니다. 절대 뛰시면 안 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셔터가 열렸고, 직원들은 사람들을 4열종대로 줄 세우기 시작했다. 첫째 날의 교훈이 컸던 듯 했다. 역시 포켓몬이다. 불과 하루 사이에 진화했다.
우리나라는 카드보다 게임의 인기가 더 크다. 그래서인지 정식 개장 전에 모인 사람들은 첫째 날보다 많았다. 포켓몬 대회는 카드와 게임 모두 연령을 기준으로 주니어, 시니어, 마스터로 나뉜다. 주니어는 따로 접수했지만, 시니어와 마스터는 접수대가 분리되지 않아 줄이 길고 혼잡했다. 하지만 1시간 일찍 오는 준비성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줄을 선지 30분 만에 접수를 끝내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대회장에는 포켓몬스터 배틀 BGM이 틀어져 있었다. 참으로 적절했다.
대회를 시작하며. 닌텐도 아래의 것은 참가 상품인 포켓몬 “루나아라”의 와팬이다 Ⓒ 박재연 기자
게임에 집중하는 참가자들 Ⓒ 박재연 기자
대회 방식은 무작위로 7명과 적외선 통신 배틀을 진행한 뒤, 결과에 따라 승점을 부여해 합산하고 상위 16명을 추려내는 방식이었다. 동점자의 경우 최다 연승자가 누구인지, 연승 수도 같다면 누가 먼저 연승을 시작했는지로 순위가 결정된다. 이번 대회 마스터 분야에서는 이것마저 같은 경우가 3명 있었고, 이들은 재경기를 했다. 이번 대회가 얼마나 치열한지 느낄 수 있었다.
에이, 설마 한 번을 못 이기겠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박재연 기자
나는 7전 전패로 예선 탈락했다. 처음 만난 상대에게 와팬 받으러 왔다고 소개했는데, 게임을 시작하며 긴장 풀고 쉬어가는 승점 자판기로 생각해달라고 소개했는데, 현실이 될 줄이야. 나의 최고 기록은 한 경기에서 포켓몬 2마리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선수증은 7전이 끝난 뒤 대회 측에서 점수 계산을 위해 수거했다.
세상 모든 德(덕)질을 위하여
판교 포켓몬 행사 참여는 최근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 편하게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나의 경우 같은 덕질을 위한 소비를 문제시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덕질이 내 소비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밥을 굶거나 생필품을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으로 예산을 잡아두고 그 예산을 넘지 않는다. 얼핏 즉흥적인 지출로 보여도 나름 계획적인 소비다. 남들에게 포켓몬을 강요하지 않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공적인 일을 미루지도 않는다.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며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다면, 덕질은 건강하고 옳은 행위다. 나는 기사를 쓰며 제목에 ‘德(어질 덕)’자를 사용해 이를 표현했다. 포켓몬이 아니더라도, 합법적이며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상을 향한 도덕적인 열광은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 중 하나라는 의미다.
더불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취향은 다르다. 설사 취향이 같을지라도 정도와 개개인의 상황만큼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덕질은 애초에 누군가의 참견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몇 가지 알아주었으면 한다. 덕질과 열정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건전하다면 모두의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가 왈가왈부할 수 없음을. 응원받지 못할지언정 비하의 대상은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