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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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안전한' 화장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모두를 위한 ‘안전한’ 화장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 성중립 화장실

 

현대카드의 성중립 화장실 논란

 

현대카드 부회장 정태영 씨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사진이다. 정태영 씨는 사진과 함께 올린 글에서 남녀공용 화장실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냈다. Ⓒ 현대카드 부회장 정태영 씨 블로그

지난 4일, 자신을 현대카드 위촉계약사원이라고 밝힌 한 여성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공개했다. 이 여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유부남 팀장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관리자에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관리자가 사직서를 찢어버리는 등 피해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회사의 대응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한편, 피해 여성의 폭로 하루 전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이 올린 현대카드 사내 성중립화장실 설치 소식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현대카드를 비판하는 네티즌들 사이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이렇게 여성폭력이 만연한 현대카드에서 과연 안전한 성중립화장실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까?”

 

한때 페미니즘의 상징이었던 ‘여자화장실’

한때 남성과 분리된 여성만의 화장실은 페미니즘의 상징이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4-7대 내리 당선되어 활동했던 여성 정치인 박순천은 방광염을 달고 살았다. 당시 국회 건물에 여자화장실이 없어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소변을 참다 보니 방광염이 생겼던 것이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의 올가 거슨슨은 연구보고서를 통해 화장실에 관련한 논쟁이 언제나 권리투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 여성을 위한 공중화장실에 대한 규정은 1887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처음 제정됐다. 이 규정의 제목은 “공장과 공장에서의 위생 규정 준수를 보장하는 법안”이었다. 공장의 여자화장실은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을 당하는 소수자들과 장애인 역시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다. 성중립화장실은 유구한 ‘화장실 권리를 위한 싸움’과 변화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스웨덴의 성중립화장실, ‘중성 대명사’의 나비효과

성중립화장실을 반대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 우리나라와 달리 스웨덴은 공중화장실의 상당수가 성중립화장실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어떻게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발명했을까? 시작은 의외로 ‘말’의 문제였다.

Upsala Nya Tidning이라는 신문의 한 칼럼의 스캔본. Ⓒ Dag Dunås의 Facebook

1966년, Upsala Nya Tidning이라는 신문의 한 칼럼에서 Rolf Dunås라는 인물이 스웨덴도 핀란드처럼 3인칭 중성대명사 ‘Hen’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처음엔 별 반응 없던 hen은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며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했고, 2007년 경부터 일관되게 hen을 사용하는 컬트 잡지가 등장했다. 개인 블로거 등을 중심으로 hen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2013년 2월 스웨덴 성평등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hen’을 사용했다. 2015년, ‘hen’은 스웨덴한림원이 만드는 스웨덴어사전 14차 개정판에 공식 단어로 등재됐다.

스칸디나비아지역 전문가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박노호 교수는 'hen‘이 “남성과 여성으로만 확연히 구분되어왔던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영향을 미쳤고 그 대표적인 예가 화장실 성 구분 표시”라고 설명했다.


스웨덴 세이브더칠드런의 성중립 화장실 표시. Ⓒ 박노호 교수 제공

 

2014년 3월 3일, 스톡홀름을 포함한 6개 도시가 성중립화장실 설치를 결정했다. 이 일을 계기로 스웨덴에서 본격적인 성중립화장실 설치가 시작됐다. 박노호 교수는 “현재 스웨덴은 공공부문과 학교에서 성중립화장실이 빠른 속도로 일반화되고 있으며, 민간 부문에도 확산되는 중”이라고 전했다.

미국의 몇몇 대학은 성중립화장실을 설치했거나, 이를 확산시키고 있다. 2014년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의 퀴어조직인 스톤월센터는 “미국 전역에 성중립화장실을 갖춘 학교는 150개 이상”이라고 밝혔다. 일리노이주립대학교는 ‘모든 가족’ 화장실을 ‘모든 성별’ 화장실로 재분류했다. 2015년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대학언론인은 2014년 12월 학교 내 성중립화장실 13개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싣고 학교 내의 성중립화장실 확산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치안문제 해결 없이 성중립화장실 위험하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최근 부산지방경찰청의 스탑 다운로드킬(Stop DownloadKill)’ 프로젝트 결과를 보자. 부산지방경찰청은 일반적인 불법촬영영상 같은 장면이 나오다가 갑자기 귀신이 등장해 불법촬영의 폐해를 알리는 영상을 제작했다. 이 영상은 국내 파일공유 사이트 23곳에 매일 업로드됐다. 2주, 2개월도 아니고 2주, 딱 14일간 이 영상은 무려 2만 6천 건이나 다운로드됐다.

박노호 교수는 “스웨덴은 성평등이 일찍이 정착되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사회적으로 치안 역시 가장 안전하다고 할 만큼 앞서있기 때문에 성중립화장실과 성중립탈의실의 논의에 있어 치안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성 구분 없는 화장실 문화뿐만 아니라 성 구분 없이 안전하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치안의 확보 역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남녀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남녀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성중립화장실은 당분간 낯설고 위험한 발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대카드의 성중립화장실로 돌아가보자. 정태영 부회장이 성중립화장실 설치 계획을 밝히자 한 네티즌이 직장 내 성범죄가 만연한 현실을 지적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와 들이지 않아도 될 돈과 시간을 들여 범죄소굴을 만드는 일”이라고 지적하자 정태영 부회장은 “화장실이 남녀공용이면 (범죄)소굴이 되고 남녀유별이면 안전해지나요?”라고 반문했다. 일견 옳은 말이지만, 성중립화장실이 기존의 성별 분리 화장실에 비해 구조 상 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이 접근하기에 쉬워 보인다는 점에 대한 해명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모두가 안전하지는 않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

Ⓒ 성공회대 제32대 총학생회 바다

 

물론 제32대 총학생회 ‘바다’(이하 ‘총학’) 역시 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지난 3월 22일 총학생회선거 정책토론회 당시 총학의 태도는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의 태도와 유사했다. “몰카 문제는 성별분리 화장실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라고 답변한 것이다.
이후 총학은 카드뉴스 캠페인을 통해 ‘화장실 내부에 안전벨을 설치하겠다’는 대책을 공개했다.안전벨 설치 외에 언급한 다른 대책은 없었다. 화장실 안전벨은 화장실 내에서 물리적 공격을 당할 경우를 전제로 하는 안전대책이다. 불법촬영에 대한 대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총학생회 차원에서 화장실 불법촬영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일까?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는 학생처와 협의하여 불법촬영장비 탐지기를 4대 구매한 뒤 학내 화장실을 자체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올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파랑’ 선본 역시 서울시와 협력하여 여성안심보안관이 학교 내 화장실을 전수조사하도록 하고, 불법촬영장비 탐지기를 구비하여 자체점검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에게 ‘대여’해주겠다고 나섰다. 조사 후 결과에 따라서 현재 학내경비 인력으로 부족하다면 사설 보안업체를 통해 추가로 경비 인력을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출마 선본 '파랑'의 선거 공약 게시물. Ⓒ 트위터 이용자 @CuCuGSMS 제공

 

혹시 불법촬영장비 탐지 비용이 너무 비싸서 우리 총학의 예산으로는 장만하기가 불가능한 걸까? 직접 찾아봤다. NAVER몰카탐지기라고 검색하니 5만 원 이하의 개인용 탐지기도 있지만 30만 원 선의 탐지기가 가장 많고, 전문가용 광대역 탐지기는 129만 원이었다.

어차피 학내 불법촬영 문제는 불거진 적은 없지만 예방해야 할 문제다. 성중립화장실을 설치하는 김에 불법촬영도 예방하고, 성중립화장실에 대한 불안감도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울 수는 없었던 걸까.

우리는 ‘성중립화장실’이라 부르는 것을 영어 사용자는 'All gender restroom'이라 부른다. 스웨덴에서는 뭐라고 부를까? Toalett för alla, 번역하면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부른다.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모두가 근심이 없어지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이용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안전하지 못해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면, 과연 ‘모두를 위한 화장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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