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월간 피임 0호: 나는 섹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Prologue: 나는 더이상 섹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해당 칼럼은 앞으로 연재될 알리 성 칼럼: 피임편의 프롤로그입니다.

피임법과 관련된 칼럼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

 

방금 깨달은 건데, 나, 생리를 하지 않는다. 뒤통수가 꽉 조이듯 아프다. 시야가 까맣게 좁아진다. 숨이 가빠져 온다. 심장이 튀어나와 귀 바로 옆에서 쿵 쿵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 교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그저께 생리를 했어야 했다. 경구피임약을 복용한지 1년째이고, 매달 이변없이 휴약기 3일 이내에 생리를 해왔기 때문에 반드시 했어야만 했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검색을 해본다.

‘생리를 안해요.’, ‘관계 후 생리’, ‘임신 가능성’, ‘피임약 생리’, ‘피임약 임신가능성’, ‘피임약 배란’

이미 수십 번 검색해 본 문구들이었기에 손에 익어있다.

하지만 의사들의 답변은 나를 더 불안하게 할 뿐이다.

‘임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마지막 관계 후 15일이 지난 후 테스트기 사용을 권장합니다.’

‘8일 후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해보십시오.’

서둘러 생리 달력 어플을 열어본다.

‘이날인가? 아니면 이날인가? 설마.’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본다. 셋째주 토요일, 미처 콘돔을 준비하지 못했던 날, 분위기에 휩쓸려 피임도구 없이 관계를 맺었다. 불안함은 있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피임약을 제 시간에 챙겨 먹지도 않았으면서, 심지어 복용을 며칠 빼먹은 적도 있으면서, 그렇게 관계를 맺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끝을 모르고 뻗어나간다.

‘지금 이 내 배속에 아이가 생겼다면 어떡하지? 학교는 졸업할 수 있을까? 내 장래는? 남자친구는 무어라 말할까?’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어 다른 단어를 검색한다. ‘임신중절’

‘내 일이라서 검색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한번 알아보는 거야.’ 속으로 되뇌이며 손가락을 바쁘게 내린다. 목이 메인다. 수술비용, 절차, 방법, 그리고 ‘낙태죄’ 서둘러 화면을 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방 문을 닫고 그날의 나를 떠올린다. ‘이번 한번만은 괜찮겠지. 여태까지 아무 일 없었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가 미련하고 미워서 버틸 수가 없다. 내 일이 아닐 줄 알았다. 내 일이 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때, 밥을 먹으러 나오라는 엄마의 다정한 부름이 들린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도와줘 엄마. 어떻게 해 나. 도와줘.’라고 울부짖으며 엄마를 붙들고 싶다. 고등학생 시절, 모의고사를 망친 그날처럼. 더 옛날로 돌아가, 초등학생 시절, 힘 센 친구에게 볼펜을 빼앗겨서, 엄마에게 울며 매달렸던 그날처럼.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 한달 전으로 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건다. 그는 다정하게 나를 달래며 묻는다.

 

그는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대답한다.

“아닐거야. 너 약도 잘 먹잖아. 설마……. 그렇지?”

네가 던진 위로의 말에는 ‘나’라는 주어는 없었다.

‘그렇지?’ 라는 확인의 질문은 나에게 질책이 되어 돌아온다.

결국 이건 너의 일이 아닌 것이었다.

이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와는 관련 없는 문제인 것을 안다.

그저,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의 문제는 온전히 너의 일이 될 수 없을 뿐이다.

내가 원해서, 내가 선택해서 한 섹스라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무게를 견뎌내야만 하는 것인지.

나에게는 그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그날 밤, 속옷에 비친 새빨간 피에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리고 그날, 나는 더이상 섹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프롤로그를 구성할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기존 기사의 형식을 깨고 이야기하듯 전개해도 괜찮을지,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이야기해도 되는건지, 그리고 의도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 끝에 기사의 몇가지 기준을 세우고 나름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우선 제 경험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사체보다는 현재시제로 일기장에 쓴 것 같은 형식이 더 현장감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성생활을 하는 여성 학우들 중 다수가 저와 유사한 경험-그 정도는 다르겠지만-을 한 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내 감정과 상황을 최대한 ‘존재했던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때로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임의 중요성을 보다 새로운 형식으로 강하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임신을 원하지 않는 연인사이에 피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임이 왜 중요한지 깊게 생각해본 학우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피임의 중요성을 못이 박히게 들어왔지만 ‘성병예방, 원하지 않는 임신은 불행’과 같은 추상적인 맞는 말은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저의 절박했던 상황을 통해 경험적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피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하지 않는 임신은 남녀 모두에게 재앙이다라는 메세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임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물론 남녀에게 있어서 그것이 가지는 무게는 어쩔 수 없이 상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력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 처한 타인의 감정을 어느정도-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이해’하고 ‘공감’ 할 수는 있는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기사를 통해 학우들에게 모를 수 있었던, 어쩌면 모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사랑하는 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는 연인간 더욱 깊은 관계 형성과 건강한 성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 피임하고, 안전 섹스하고, 다음 호에 만나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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