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대학알리

성공회대학교

[vol.01] 마이너보이스 Ep.2: 바로 이곳에, 그녀가 있었다

작은 걸음으로 십 분, 큰 걸음으로는 오 분이면 한 바퀴 빙 둘러볼 수 있는 캠퍼스. 느티 그늘 아래 서면 학교 건물들 대부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내 발 아래가 다 길인 사람들에게는 캠퍼스에 먼 곳도, 못 갈 곳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는 캠퍼스에 혼자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아직 많습니다. 길이라 해서 모두에게 다 같은 길은 아니니까요. 두 번째 마이너보이스에는 그녀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지하철도 **역과 지상을 잇는 엘리베이터 앞. 어느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도 좀 타자.” 대답은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나와 은선씨 둘이 탄 것으로 이미 꽉 찼다. 엘리베이터의 젊은 두 여자가 당신 말을 못 들은 체 하자, 아주머니는 선심 쓰듯 “아니, 아니, 됐어. 가, 가”라며 어서 올라가라 손짓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지상으로 오르는 동안, 은선씨와 함께 **역으로 오면서 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쭉 펼쳐졌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를 곁눈질하던 사람들, 아예 몇 걸음 뒤에서 빤히 쳐다보던 시선. 나는 그 무례에 기막혀했지만, 은선씨는 그저 담담했다. 처음 겪은 일이 아닌 까닭이다.

 검은 전동휠체어의 왼쪽 손잡이에 빨간 라바 한 마리가 딱 붙어서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다. 짧은 더듬이와 도톰한 혀가 하늘로 삐쭉 솟은 녀석을 꼬마들이 좋아라하는 덕에, 은선씨는 작은 길동무가 더 사랑스럽다. 말초신경으로 갈수록 근력이 떨어지는 몸. 손가락 발가락에는 거의 힘이 안 들어간다. 우리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진은선(23, 4학년)씨. 그녀는 지체장애인*이다.

어디든 다 가봐야겠다

 신나는 요즘노래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은선씨. 하지만 졸업을 코앞에 둔 대학생의 하루는 짧다. 실습하는 센터에서 일하랴 사업에 참여하랴 분주하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그녀는 어딘가에서 일을 하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비(非)장애인과의 소통은 때로 답답하다. 은선씨를 처음 만나면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말실수라고 할까 조마조마하고,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도움을 어떻게 줘야 할지 고민한다. 반대로 무심한 경우도 있다. 장애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강의실의 수십 명 학생 중에 당연하다는 듯 은선씨를 지목하는 사람들. 그들이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장애등급이 몇 급이냐고. 원치 않게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어지는 순간, 은선씨는 꼭 ‘개인정보 털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친구들 덕에 은선씨의 학교생활은 대체로 ‘맑음.’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 묻자, 은선씨는 “제가 친한 친구가 많아요. (한 명 골라서 말했다가)다른 애들이 실망하면 어쩌죠?”라며 작은 별처럼 웃는다.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던 새내기시절.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에 안 가면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말을 들은 은선씨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불편하고 힘들고 미안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어디든 다 가봐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고 간 새터에서는 학과 선배들이, 새 학기부터는 친구들이 은선씨에게 다가왔다. 그들과 어우러지며, 은선씨는 워크샵도 엠티도 잘 다녀왔다. 속초 여행길에서 만난 넓은 모래사장에서도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였다.
 
“정말 잘 만난 것 같아요, 친구들을. 정말 감사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 인연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고칠 게 너무 많은데

 잊을만하면 ‘어느 학교 호수에 빠진다며?’라는 짓궂은 소릴 듣는 아담한 캠퍼스에도 은선씨 혼자 가기 어려운 곳은 있다. 사회복지학과 과방 쪽으로 난 1층 출입구 경사로를 통해 나눔관(학생회관)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위아래 층을 오가기는 어렵다. 층과 층을 잇는 길이라고는 온통 어지럽게 쌓인 계단뿐이다.
 
 일만관과 성 미가엘 성당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만관 4층의 강의실과 채플이 열리는 성당 2층으로 뻗은 길 역시 계단뿐. 다행히도, 은선씨가 접근하기 난감한 곳에 개설된 강의를 들어야 할 때엔 학교가 강의 장소를 바꿀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성당이 아닌 다른 장소에 개설된 채플이 있는 덕에, 은선씨는 무사히 네 학기 분의 채플을 이수할 수 있었다.

 
 매 학기 초에 열리는 장애학생간담회에서 장애학생과 교직원이 함께 교내에 개선할 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간담회에 요청했다고 해서 마냥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다. 학교 시설관리팀은 카페 자연드림에 휠체어로 오갈 수 있는 경사로를 설치하기 위해 몇 공사업체에 문의를 했지만 곧 퇴짜를 놓아야 했다. 장애인 편의시설을 공사해 본 경험이 없는 업체들이 ‘경사가 안 나온다’며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 하지만 시설관리팀은 포기하지 않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공사해 본 업체를 통해 자연드림에 경사로를 설치했다. 졸업하기 전에 자연드림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던 은선씨의 소망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달라진 건 자연드림으로 가는 길만이 아니다. 느티와 도서관을 잇는 콘크리트 경사로의 울퉁불퉁한 단면이 매끄러워졌고, 나눔관 출입구의 짧고 가파른 경사로가 구불구불 늘어나 완만해졌고, 학교 앞 카페 클래식에 이동식 경사로가 생겼다. 은선씨가 학교에 있는 동안에 이루어진 소중한 변화들. 그래도 여전히 캠퍼스 곳곳에는 장애인에게 불친절한 점들이 수두룩하다. 은선씨는 성큼 다가온 학교생활의 끝이 못내 아쉽다.
 
“아직도 고칠 게 너무 많은데, 졸업이라니...”
 
 모든 사람들 사이에는 숱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차이를 안고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불편함이 따른다. 그 차이를 충분히 고려치 않고 조성된 환경에서라면 더더욱. 다른 학생들에게는 되물을 필요 없이 당연한 길 앞에서 무던히 멈춰서야 했을 은선씨. 그녀가 있었기에 우리학교는 지금껏 꾸준히 더 나은 곳으로 변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모난 길을 반듯하게 다듬고 없던 길을 새로 낸 사람이 있었다. 당신과 같은 차이를 가진 사람이 와서도 학교의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한 사람. 우리는 길고 긴 삶 중에 아주 짧고 특별한, 대학생활이라는 시기를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의 이름 한 번 못 들어보고 스치는 모습조차 기억에 없다고 해도, 캠퍼스 곳곳에 남은 그녀의 흔적들이 말해준다.
 
 지난 4년 동안 바로 여기 성공회대학교에, 우리 곁에 은선씨가 있었다.

마이너보이스 단어사전
 
* 지체장애 “다방면에 걸쳐서 발생하는, 선천적 또는 후천적인 원인으로 일상생활 활동의 제약을 초래하는 신체적 기능의 손상을 의미.”
(출처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네이버 건강백과 제공, 참고일 2015.09.02.)
http://m.terms.naver.com/entry.nhn?cid=51007&categoryId=51007&docId=92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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