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9 (수)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덕질의 세계] 통장건강에 해로운 취미, 뮤지컬

|외대알리| 세상에는 수많은 ‘오덕(한 분야에 열중 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스럽게 이르는 말)’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오덕에서부터 연예인, 스포츠, 심지어 하이테크에 이르기까지 오덕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분야에 포진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느 분야의 오덕인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을 매달려 인터넷으로 특정 분야를 섭렵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오덕이라 칭함에 있어 무리가 없다.

1. 내 용돈은 통장을 스쳐 인터파크에 꽂힌다

본인의 경우에는 두 가지 분야에 집착한다. 주변 사람들이 ‘이하연’(필자의 이름이다) 하면 자동으로 그 두 분야를 떠올릴 정도로 만천하가 본인의 취향을 알고 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가? ‘뮤지컬을 좋아하면 집안 기둥 뿌리가 뽑힌다.’ 필자가 집착하는 분야 중의 하나가 바로 뮤지컬이다. 그것도 대극장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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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덕후 다 알 바로 그 뮤지컬의 티켓 가격. 어마어마하다. 가격 보소. 대학생 할인도 안 해준다.

뮤지컬을 규모로 분류하면 소극장, 중극장, 그리고 대극장 뮤지컬로 나눌 수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극장의 크기가 커질수록 공연의 규모도 커진다. 공연의 규모가 커지면 스태프의 수도 많아지고, 개런티가 높은 배우들이 출연하며, 공연장의 대관료 또한 높아진다. 한마디로, 대극장 뮤지컬에 취미를 한번 붙인 당신의 통장 잔고는 그야말로 답이 없다는 이야기다.

자. 예를 들어 보자. 국내에 현존하는 뮤지컬 커뮤니티 중 가장 활성화 되어 있는 곳은 ‘디씨인사이드-연극&뮤지컬 갤러리'이다. 매달 초가 되면 이곳은 카드값을 걱정하는 곡소리로 넘쳐난다. “나 2월에 본 공연 아직도 갚고 있어.” 라던가, “3개월로 긁었는데도 왜 200만원이 나왔지.” 등 다른 사람이 보면 “도대체 왜 저러고 사나” 싶은 글들이 수십 개씩 올라온다.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카드값에 허덕이면서까지 공연을 찾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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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공연예매 사이트 인터파크. 뮤덕은 이를 ‘공원(PARK)’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2. 들어는 봤나 ‘회전문’? 사이버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뮤지컬 매니아들, 속칭 ‘뮤덕’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공연을 한번 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전에 본 공연을 오후에 또 보고, 그 다음 주에 또 보고, 한달 후에 또 보고, 또 보고! 똑같은 공연을 주구장창 몇 번이고 본다. 뮤덕들은 이를 두고 ‘회전문 돈다’라고 표현한다. 같은 공연을 계속 보면 재밌을까? 이에 대한 뮤덕들의 대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Yes’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봤던 공연을 계속 보는 걸까? 돈이 넘쳐서?

필자는, 첫 번째 이유로 ‘다양성’을 꼽겠다. 뮤지컬을 비롯한 공연예술은 절대로 똑같은 공연이 나올 수 없다. 내가 보고 있는 공연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며, 다른 날에 행해지는 공연은 비록 똑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내가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뮤지컬 매니아들은 공연을 재관람할 때, 예전에 보았던 때와 다른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배우의 동선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든지, 대사가 수정되었다든지, 혹은 제스쳐가 바뀐다든지 하는 사소한 일들도 관람하는 사람이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펼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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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캣츠(CAT’S)>의 한 장면이다.ⓒEffie

또 다른 이유는 ‘그 작품의 성장을 오롯이 지켜보고자 하는 욕심’이라 할 수 있겠다. 갓 막을 올렸을 때의 공연과 막바지로 달려갈 때의 공연은 확연하게 다르다. 뮤덕들은 이를 흔히 ‘로딩’ 이라 표현하는데, 첫 공연에서 어색한 모습을 보였던 배우들이 공연을 거듭함에 따라 점차 그 인물의 모습을 맛깔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뮤지컬 커뮤니티를 둘러보면, 인터미션 타임에 주로 올려지는 후기들에서 ‘오늘 류정한 고음 처리 잘하더라. 저번엔 삑사리 났는데’, ‘오늘 동석이 연기 잘하네. 첫 공연보다 많이 늘었어’ 등의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공(첫 공연)’과 ‘막공(마지막 공연)’ 중 ‘막공’의 티켓팅 경쟁이 훨씬 치열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여담이지만, ‘막공’에서는 배우들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애드리브나 개그적 요소들을 많이 첨가하기도 한다. 공연 기간동안 꾸준한 사랑을 보내 준 관객들에게 보내는 나름의 팬 서비스인 것이다.

본인의 경우, 보통 뮤지컬을 감상할 때 대개 넘버(뮤지컬에서 극중에 불려지는 노래를 이르는 말) 한 곡이나 특정 장면에 매료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그렇게 푹 빠져들고 나면 꼭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배우라면 어떨까?’ 실제로, 같은 역할이라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수많은 뮤덕들은 공연을 반복해서 보며 가장 자신에게 와 닿는 해석을 해 낸 배우를 찾아내고, 또 그 해석의 공감에서 오는 쾌감을 잊지 못해 두 번, 세 번씩 같은 공연장을 찾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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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국내 최초의 뮤지컬 전용 대극장인 ‘샤롯데 시어터’의 객석 모
습. ⓒLOTTECINEMA (아래) 뮤지컬 <페임(Fame)>의 한 장면.
ⓒEdward Wong

지난해 필자가 통장을 탈탈 털어 바친 작품 ‘두 도시 이야기’를 이야기 해 보겠다. 극 중 변호사인 시드니 칼튼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마지막 장면에서 시드니 칼튼이 단두대로 올라가며 극이 마무리된다. 첫 번째로 감상했던 서범석 배우는 환하게 웃으며 단두대로 올라가는 연기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행복하다는 ‘긍정갑 칼튼’의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찾았던 공연장에서 만났던 류정한 배우의 칼튼은 장엄한 표정으로 단두대에 올라서 노래를 하다가 최후의 순간 희미하게 눈물을 비치며 웃어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 그 때 받았던 충격이란. 류정한 배우의 미소를 보는 순간, 필자는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보는 느낌이었다. 칼튼의 육신은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뭐 그런 거. 이렇게 같은 공연과 같은 인물이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관객은 극을 무척이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움이 뮤덕들을 계속해서 공연장으로 이끄는 이유가 아닐까.

3. 함께 하지 않겠는가!

뮤지컬, 참으로 비싸다. 그런데도 오늘도 뮤덕들은 자신의 ‘장(텅텅 빈 통장)’에 가벼운 애도만 표한 채 공연장으로 달려간다. 당신, 메마른 삶의 활력을 찾고 있는가? 제대로 문화생활 해 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통장을 오늘 당장 인터파크에 바쳐 보는 건 어떨까. 부담스럽다면 대학로 앞 소극장 공연부터 시작해도 좋다! 혹시 아는가? 필자의 통장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것이 더 가벼워질지!

이하연 기자 marobeblanch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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