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1 (금)

대학알리

세종대학교

헬추석을 헤븐추석으로 바꾸는 방법

개강을 하고 벌써 2주가 지났다. 막학기라 6학점밖에듣지는 않지만 이제 수업은 내가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취업준비는 매일이 평온하다. 도시 안의무인도에서 합격이란 뗏목을 만든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펴고 인강을 듣는다. 뒤에는 문제풀이로 책 한권을 푼다. 점심을 먹고 쉼터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빨았다. 앞에 흰 오리 한 마리가 지나간다.

 

아침부터 서두를 필요 없는 귀향버스!

그러고 보니 얘도 짝이 있었다. 인간보다 못한 동물도 짝이 있는데 나란 인간에게는 짝도 없다. 동물보다 못한 인생일까. 괜시리 어머니의 밥이 그립다. 안 그래도 학생회에서 판매하는 추석 귀향버스 티켓을 구입했던 터였다. 이번 추석연휴는 주말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일정이다. 하지만 간단히 하루 정도 내려가서 얼굴만 비추고 올 계획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취업 준비한다고 집에 다녀오지 않아 이럴 때라도 내려오지 않으면 다음 달부터 용돈을 줄이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시간을 냈다. 죄송스러움에 마음이 무거워졌고 동시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이 질질 끌렸다.


출처 : 서울시대중교통이용자모임

 

오가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쓸 것!

왜 항상 명절귀향버스는 기본 6시간인가? 오가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간만에 예능으로 풀고 싶기도 했다. 아니면 새로 나온 미드를 볼까? 검색을 해보니, 시청률 1위 판타지드라마인 왕좌의게임이라든가 좀비물 워킹데드의 스핀오프(외전)인 피어더워킹데드, SF서사물인 익스팬즈가 눈길을 끌었다. 왕좌의게임은 시즌 6까지 나와 이걸 다보면 추석연휴가 끝이 날 것 같았다. 결국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익스팬즈를 선택했다.


ⓒSyfy

 

귀향버스를 위한 준비물

집에 들어가기 전 ‘다있소’가 생각났다. 버스에서 장장 6시간 정도 있어야 했는데 편안히 다녀오기 위해서는 좌석의 머리 부분과 몸통 사이의 공간을 받쳐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 목베게는 필수다. 내려가면서 먹을 간단한 과자를 샀다. 본격적으로 준비물을 챙길 시간이었다. 귀향버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 펼쳐지는 곳이다. 까닥하면 정신을 놓쳐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멘탈이 깨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허나 상경 4년차인 나는 이를 미리 고려해두었던 터였다. 보조배터리를 가방에 챙겨놓고 가방에 넣었던 책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신경이 예민해서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머리가 무거워지는 내 몸을 생각했을 때, 진정한 힐링을 위해서는 그리고 잘 보지도 않을 책을 가져가는 것은 괜한 에너지낭비라고 여겨졌다. ‘깔꼼~’하게 필요한것만 챙기는 것이 에너지를 떨 뺏기면서도 연휴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명절정신이다.


ⓒ HoodiePillow, Inc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하는 진정한 명절정신을 가져요!

미리미리 준비한 덕에 ‘정신과 시간의 방’의 결계를 깨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진정한 나의 적이자 이 추석의 적은 이런 잔챙이가 아니다. 안심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치명상을 입는 법이다. 적은 가까운 곳에 있어왔다. 지난 설에 만나 뵌 친척들은 휴학하고 2년 동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실패한 내게 거듭하여 시험결과를 물어보며 나의 앞길을 걱정(?)해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수 없다. 이 날을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10회독 했다. 책에서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타인과 자신의 과제를 구분하라는 구절이 있었다. 나의 과제는 지금 현실 앞에서 착실히 취업준비를 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이것은 나의 과제이지, 친척들의 과제인 것은 아닌 것이다. 나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예의는 지켜야한다. 기본적인 선은 지키면서 내 영역을 침범해오는 타인의 무례함을 부드럽게 물리칠 나만의 방법과 용기가 필요했다.


ⓒ인플루엔셜

드디어 대망의 추석, 할머니 댁으로 가 친척들을 뵙게 되는 날이다. 들어가자마자 눈치없는 큰 아버지와 인사하게 됐다. 아니나다를까 자식농사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내 근황을 물어보던 큰아버지는 어머니의 무반응에 직접 내게 물어왔다. 심호흡을 깊게 내쉬고 차근하게 내 근황을 설명드렸다. 하반기 공채로 몇 개 기업을 넣었으며 그 중에 몇 개는 서류에서 떨어지고 지금은 남은 두 개의 면접전형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 드렸다. 그 때였다.

큰아버지의 혀가 날개처럼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을 봤다.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큰아버지의 혀를 봤다. 큰 아버지는 딩신의 젊을 적 회사생활을 이야기하며 이야기 보따리의 풀기 시작했다. 아뿔사. 허점을 찔렸다. 제2의 정신과 시간의 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정신의 힘으로 결계를 풀지 않으면 네가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꾸 손장난을 치며 큰아버지의 자랑을 흘려 넘길 수밖에. 그 때였다. 넌 이렇게 정신없이 손이나 움직이며 어떻게 진지한 일을 하겠냐고 내게 물어오셨다. 지금이었다. 이럴 줄 알고 그제 사촌 동생에게 전화를 해 근황을 물어본 터였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사촌 동생은 2년 동안 거듭된 낙방에 올해 추석은 집에서 쉰다고 말했었다. 큰아버지는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시더니 고개를 돌리셨다. 그리고 나는이때다 싶어, 말을 이었다. 요즘은 매일 몇 시에 일어나, 어떤 신문으로 아침을 깨우며, 취업 스터디를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저녁 10시가 되면 돌아와서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마친다고 조용히 말씀드렸다. 큰아버지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촌 동생의 일과와 나의 일과를 비교하신 듯 잠시 말이 없으셨다. 이윽고 내 대답이 조금은 불편하신 듯 TV에서 나오는 예능올림픽 이야기로 화제를 넘기셨다.

집에 올라오는 길은 여전히 막혔다. 그러나 간만에 어머니 얼굴을 보며 밥도 먹고 큰아버지께 설욕도 하니 속은 시원했다. 가서 해야 할 공부들이 눈에 어른거렸지만, 오늘만은 이 가슴에 떠오른 환한 보름달의 모습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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