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대학알리

건국대학교

[인터뷰] 무지개 교실이 담아낸 청소년 성소수자의 현장 ① 학교 밖에서 만난 교실

지난 1월,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가 ‘부산지역 학생 성소수자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지난해 하반기 부산지역에 재학 중인 청소년 성소수자 208명을 대상으로 한 본 조사는 응답자 중 43%가 학교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경험이 있음을 밝혔다. 이에 아수나로 부산지부는 “학생 성소수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숨겨야 하고 자신을 혐오해야 하는 말에 동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소수자란 정체성 자체가 괴롭힘의 이유로 정당화되는 가운데, 학교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란 설명이다. 더불어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안전과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학교의 변화를 요청했다. 
이런 비판은 2021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괴롭힘과 차별은 정부의 무대응 문제일 뿐만 아니라, 차별과 고립을 조장하는 현 정책들의 산물”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정상성’에 초점화된 학교 체제와 더불어 이를 지탱하는 사회 전반이 변하지 않으면 위기는 심화될 뿐이란 경고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와 청소년 성소수자의 관계를 고민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있다. 정치단체인 ‘노동·정치·사람’과 트랜스젠더 청소년 인권모임 ‘튤립연대’가 함께 주최하고 대학생들이 주체로 운영 중인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학교, ‘무지개 교실’이다. 무지개 교실의 구성원은 △탱이 △뺑이 △쟁이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행정 관계자 등의 위계로 이뤄진 기존 학교의 호명이 아닌 평등에 기반한 명명을 사용한다.

담임 교사를 속되게 부르는 ‘담탱이’에서 착안한 ‘탱이’라는 표현은 교과목 정보를 전달하는 이들을 가리키며 팀원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뺑이치다’는 은어에서 따와 ‘뺑이’라 한다. 그리고 무지개 교실을 통해 교과목 수업을 수강하고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들은 ‘쟁이’라 한다. 학업 활동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접미사 ‘쟁이’를 쓴 것이다. 이들이 상상하는 학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이 제안하는 방향성은 무엇일까. 건대알리가 지난달 16일,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이들의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네 명의 탱이와 한 명의 쟁이에게 그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수치를 넘어 무지개 교실로.

 

Q. 무지개 교실의 ‘탱이’와 ‘쟁이’ 그리고 ‘뺑이’는 어떻게 모이게 됐는가.

 

가람(국어과 탱이) :

원래 친분을 계기로 무지개 교실의 일원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홍보와 자금 확보를 위해 열었던 ‘파티’를 통해 함께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파티 홍보 글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접한 분들이 “나도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주고 싶은데 뭐 하는 데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오거나, “나도 저기 가고 싶은데 뭘 하는 곳이지?”라는 질문을 안고 와서 당일 행사를 통해 ‘무지개 교실’이란 공동체를 경험하고 탱이나 쟁이 혹은 뺑이가 됐다.

또 처음 쟁이를 모집할 땐 최소 8명에서 10명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여러 채널을 활용했다. 성소수자 관련 오픈 채팅에 모집 내용을 공유하고, 튤립연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트렌스젠더 보이스룸(단체 음성 대화)을 통해 검정고시를 준비한다는 분께 말을 걸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관한 고민에 댓글을 남긴 적도 있다. 이 외에도 포스터를 뽑아 트랜지션(성정체성의 내부 감각을 젠더 외형 표현, 성별 특성과 일치하도록 바꾸는 과정)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병원 앞에 붙이거나 퀴어 술집에 게시했다.

 

 

꽁치(도덕과 탱이) :

쟁이 모집은 홍보 채널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기도 하다. 자습실을 열거나 영상제작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학교가 여기 있으니까 와라”가 아니라, “여기에서 같이 공부해주세요, 밥 먹어주세요”라고 접근했다. 같이 영상 제작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 공동체(무지개 교실)가 즐거운 곳이란 믿음을 주려고 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애매하게 못 끼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탱이 중엔 대학에서 성소수자 운동 혹은 인권 관련 활동을 했던 분들이 많은데, 사실 서울권 일부 대학을 제외하곤 학내에서 유의미한 실천을 통해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뭔가 해보고 싶고, 다른 성소수자에게 기여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Q. 그렇게 모인 무지개 교실은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일상과 동반하고자 하는 공동체처럼 보인다. 청소년기에 형성하는 다양한 관계망 가운데, 특별히 ‘학교’라는 집단의 대안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현하게 된 이유가 있는가.

 

꽁치 :

처음 (무지개 교실을 상상한) 주체들부터 학교에 한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자퇴한 경험이 있거나, 중고등학교 재학 중 힘든 일을 겪었거나 후회와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온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레 ‘학교’를 구상하게 됐다.

사실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에게 학교는 ‘수치를 배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폭력이나 혐오 발언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나는 왜 저 사람들과 다르지, 어떤 조건 때문에 저 사람들과 원하는 만큼 어울릴 수 없지’를 고민하고 ‘나는 나를 숨겨야겠다’거나 ‘나는 이런 면을 더 포장해야겠다’는 수치를 배우는 곳이란 의미다. 더불어 ‘수치를 키우는 곳’이 학교이기도 하다. 많은 퀴어가 중고등학교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거나, 다른 당사자 친구들이 곁에 있더라도 어쨌든 (학교라는 사회화 기관이 형성하는) 주류적인 분위기 속에선 수치를 학습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대학 진학이나 서울권 진출을 간절히 바란다. 서울에선 퀴어 커뮤니티를 비롯해 동질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작은 거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청소년기보단 (성인이 되면)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으니까. 나 역시 ‘저길 가면 뭔가 조금 다르겠지, 저길 가면 무시 받지 않고 살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대학 입시를 열심히 준비했다. 말하자면, “능력을 키워서 살아남으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대학 사회에서 역시 ‘수치’는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부분이 자퇴 경험이나 퀴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기에, ‘나는 이런 걸 겪고 살았는데, 쟤들은 다르구나’라는 생각과 결별하기 힘들다. 분명 대학이나, 서울의 특정 거점들이 자신을 부분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서 아쉬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내가 나를 진정으로 표현할 공간은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우리가 벗어나고자 했던 ‘학교’에서 제대로 경험되지 못했던 기억이나 다뤄지지 못했던 상처들이 ‘수치’로 이어진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번 학교를 만들어서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겪은 개인적인 ‘수치’들에 개입하는 실천을 해보자는 목표를 설정하게 됐다. 덧붙여, 누군가 대학에 가서 커뮤니티를 누린다는 말은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건강하고 주변 환경 괜찮은’ 사람만 인정하는 계급화된 문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걸 넘어서고 싶었다. 성소수자 인권이 많이 가시화됐고 또 성소수자 운동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주체로 호명되는데, 이걸 실질적인 힘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파편화가 아닌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차원에서 ‘학교’라는 플랫폼을 시도하게 됐다. 대학에서 각자도생하는 선택지만 마주했던 대학생 퀴어들과 한편으론 그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 학교 밖 퀴어들이 만나고, 성소수자로서 연대하고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때 긍정적인 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성소수자를 말하지 않는 학교, 유보되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삶

 

Q. 학교와 맺어진 ‘수치’라는 감각이 말해주듯, 통상 사회가 말하는 ‘학교’라는 공동체는 “정상성 사회가 인정할 만한”의 차원에서 사회화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공교육이 성소수자 청소년을 다룰 때 가장 문제적인 관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준(사회과 탱이) :

난 게이인데, 트랜스젠더가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공간과) 결별한다면 게이는 (공간의 문제보단) 성적 지향의 만족이 주요하다. 많은 학창시절의 게이들은 ‘숨기기’를 택하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운 방식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성소수자에 대해, 게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틀렸다”고 생각해서 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가 성소수자 청소년을 다룰 때 가장 문제적인 관점이라고 한다면, ‘정상성’을 규정하는 것과 더불어 암묵적으로 당사자에게 “넌 (너의 정체성 혹은 성적 지향을) 숨길 수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안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과 존재를 밀어버릴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화해할 수 있는 (무지개 교실 같은) 공간이 계속 필요하다고 본다.

 

익명(쟁이) :

다룰 때의 관점을 답하기에 앞서, 애초부터 안 다루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존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의 입에서 성소수자와 관련된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성소수자는 ‘쟤 이상하다’는 말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청소년 성소수자는 학교에서 자연스레 배출돼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해당 안건은 “공교육이 성소수자 청소년을 다룰 때의 문제”라기 보단, “이젠 다뤘으면 좋겠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꽁치 :

성소수자를 언급하지 않는 문화와 관련해서, 본인은 학교가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나이브(naive)하게 배려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만 해도 학교에선 ‘게이 같은 애’, ‘레즈 같은 애’라는 조롱으로 동성애자를 혐오했고, 그게 직접적인 폭력들로 구체화되며 성소수자들을 규율하기도 했다. 또 동성 간의 스킨십 등을 명시적으로 규제한 교칙이 있었다. 반면 오늘날은 ‘대놓고’ 그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성소수자 학생들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하지 말자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물론 한편으론, ‘괜히 말했다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에 언급하지 않는 교사들도 있는데, 여기서 배려를 문제 삼는 건 그런 차원에서 이뤄지는 언행이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역할을 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들 지적하는 부분이 성소수자들이 가시화돼 있지 않다거나,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매뉴얼이 없다는 건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난 중학교 자퇴 후 고등학교를 재입학할 때 젠더 표현을 하고 있었는데, 화장실 이용이 문제가 됐다. 그 당시 난 학교에 해당 사안의 대책 마련을 요청했고, 교장의 승인을 거쳐 제3의 화장실을 성중립 화장실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다. (정상성에 벗어난) ‘이상한 애들’을 위 클래스(Wee 클래스) 보내서 상담받게 하고, 성중립 화장실을 보장해주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왜 얘가 이런 배려를 받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을 오롯이 당사자 개인이 감당하도록 맡겨버린다. 이건 성소수자를 공동체에 잘 적응하게 하는 방식이나, 다른 사람과 제대로 어울릴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문제아’들을 조용히 분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교육 공간에선 자연스럽게 이해받지 못하는 관계들을 설명할 책임이 있는데, 그걸 적당한 서비스로 제공하고 개인에게 맡겨버리니 적극적인 소통이나 제대로 된 사회화의 계기는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본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적응하기 어렵다고만 다룰 것이 아니다. 2024년은 (내가 학교를 다녔던) 2016년과 많은 것이 (좋은 방향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의 공교육은 여전히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거리로 밀려나고 소외되도록 하는가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개인화된 방식의 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람 :

그런 차원에서 학교는 ‘나’가 되는 것을 유보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꽁치가 말한 것처럼 옛날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혐오 발언을 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너희도 말하지마, 나도 안 물어볼게”의 분위기다. 그냥 그렇게 유보하고 내버려 두다가 20살이 되면 대학가고 그때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청소년 성소수자도 “지금은 진짜 내 삶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빨리 졸업이나, 자퇴한 다음에 서둘러 돈을 벌어서 트랜지션을 하고 성별 정정을 한 뒤 대학에 가면 그 다음에야 진짜 내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특히 지방에 살던 청소년들은 빨리 성인이 돼 홍대나 이태원 혹은 종로에 가고 나서야 ‘성소수자다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 전에도 삶이라는 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수행해야지만 ‘진짜 동성애자’, ‘진짜 트렌스젠더’가 되는 게 아니고 트랜지션 전의 삶도 나의 것인데 (학교가 가르치는 것들이 당사자로 하여금) ‘대학에 가야지만’ 혹은 ‘법적 성인이 돼야지만’ 아니면 ‘수도권으로 가야지만’ 혹은 ‘공부를 좀 하고 성소수자로서 자기 발화를 할 수 있어야지만’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로컬의 진짜들’도 있다. 서울의 성소수자가 자주 노출된 탓이지, 로컬에서도 자기만의 삶을 영위하는 성소수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청소년 성소수자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고, 모든 청소년이 겪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곧 학교라는 공간이 청소년에게 주는 감각은 지금은 내 삶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과 당장은 진짜 내 삶이 아닌 준비단계일 뿐이고 당연히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들도 다 하는 걸 나만 못하면, 못 견디는 내가 이상한 거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 ‘학교’인 것 같다.

 

꽁치 :

그런 감각이 성소수자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학교 밖에 대한 인식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과제라고 본다. ‘학교 밖’ 청소년, ‘학교 밖’ 성소수자 청소년들에 대한 관점은 정상성을 규명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밀려나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들로 한정돼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학교 밖 청소년들이 가진 잠재성이나 능력들을 가린다. 학교와 교과서, 급식이 없어서 힘들긴 하지만 그게 없어도 나름 자기만의 삶을 그 자체로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삶 속에 어떤 교훈과 잠재성이 있고 어떤 교육의 문제가 있는지는 진중하게 보지 않는다. 담론 내부에서도 학교 밖 청소년, 성소수자 청소년을 ‘학교 밖의 힘든 이들’로만 다뤘던 한계가 있었다.

또 그 한계 때문에 실제로 펼쳐진 현실과 무관하게 당사자 역시 자기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와 열등감, 수치가 잠재성을 가져간다. 그래서 그 잠재성을 함께 발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무지개 교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② 무지개 교실이 그리는 세상은 에서 계속

 

*본 기사의 인터뷰이를 향한 인신공격을 비롯해 악의적인 비방·비난 행위는 무통보 삭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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