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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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 딱 120년 전 요맘 때 즈음이었다

 딱 2년 전 요맘때 즈음이었다. 매주 토요일 마다 수백만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누군가는 박근혜 일당이 저지른 부당한 행위에 분노하며, 누군가는 그들이 망가뜨린 민주공화국의 정상화를 바라며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굉장한 기억으로 남았으며, 아마 우리가 행동하고 사고하는 방식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도 커보인다. 최근 본 기자의 한 지인은 "촛불을 들었던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 말했다. 그 때 꿈꿨던 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런 이유로 촛불항쟁 2주년 기사를 쓰기는 참 힘들었다. 이미 많은 언론사들이 비슷한 기사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광화문 앞에서 일종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때마침 발견했다. 게다가 여기에 깊숙히 관여한 사람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모티브가 된 인물이었다. 편집장이 원하는 재밌는 소재로는 충분해 보인다. 지금부터 본 기자는 한반도 역사상 최대규모의 시위 2주년 즈음하여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시위를 소개해 볼까 한다.

 

생긴 건 조선인인데 국적은 미국인이오

 독자들도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았거나 혹은 들어 보았을 테다. 극중 이병헌이 연기한 ‘최유진’은 원래 조선의 노비였지만 미국으로 달아나 미국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어떤 이들은 이 설정을 두고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최유진은 실제 역사 속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인물의 이름은 바로 필립 제이슨. 미국으로 가기 전 조선식 이름은 서재필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서재필은 <미스터 션샤인>의 최유진과 달리 잘 나가는 양반집 아들이었다. 그는 18살 때 이미 과거에 급제했고,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는 전형적인 조선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과거 급제 이후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김옥균과 같은 인물들을 만나 개화사상을 접하더니 결국 개화에 반대하는 조선의 보수 세력을 몰아내려는 '갑신정변'에 가담해 몇몇 보수파 대신들을 죽이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혁명은 보수파가 3일만에 다시 집권하면서 '3일천하'로 끝났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조선의 모범생 서재필은 졸지에 대역죄인이 되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달아난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조선의 모범생이었던 서재필이 십대시절 촬영한 사진. 아직 상투를 틀고 있다.

 

 그렇게 서재필은 난대없이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떠도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 던 것 같다. 그는 1년 정도 샌프시스코를 떠돌다가 YMCA의 도움으로 영어를 배우고, 선교사를 후견인으로 만나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1890년에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교 의대에 입학하기에까지 이른다. 고작 6년 만에 동양인 거지가 뉴욕 명문대의 학생이 되었다.

 

상투를 자른 서재필. 서재필은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미국인이 된다.

 

 

1890년대 뉴욕 맨해튼

 

 

조선에 도착한 민주주의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냐만은 이 때 까지 조선은 왕정국가였다. 모든 정치는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조선의 인민들이 이 과정에 끼어들 길은 없었다. 그렇다보니 아무리 높은 관료라 해도 연설과 토론에 익숙하지 못했고, 신문과 같은 매스 미디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임금 앞에서 안경을 쓰고 있는 걸 무례한 행동으로 여길 정도로 전 근대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게 현실이었다.

 서재필의 망명생활이 10년째 되던 해, 조선에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은 개화파가 재집권한다. 그 바람에 서재필도 귀국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그는 한국어를 모두 잊어버린 척 하며 '필립 제이슨' 이라는 미국 이름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고종 앞에서 안경을 쓰고, 짝다리를 짚는 등 조선의 전 근대적 문화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의 모습도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온지 1년이 된 1896년, 한국어를 까먹은 척 하던 필립 제이슨은 최초의 한글신문 독닙신문을 창간해 매스 미디어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물론 독닙신문이 최초의 신문은 아니다. 그 전에도 한성순보와 같은 신문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이 신문들은 대부분 한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진입장벽이 높았던 반면 독닙신문은 현대 한국인들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한글을 사용했다. 그 덕에 이 신문은 백정이나 노비와 같은 천민들도 읽을 수 있었고, 한 부를 200명이 돌려봤다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필립 제이슨은 이 신문에 직접 논평을 기고하며 서구 사회의 풍습과 민주주의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동그라미 친 사람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다.

 

 

 독닙신문으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필립 제이슨은 1896년 부터 협성회를 창립하고 근대식 토론과 연설, 회의진행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때, 관리들조차 연설하길 힘들어 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경우 대중들 앞에서 자기주장을 펼칠 이유가 없었던 것. 하지만 토론과 연설 문화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서울 인민들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필립이 주관한 토론회는 처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매 주 300명이 넘는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이 토론회에는 여성들이 토론자로 참석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까지 했다.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졌다.

 

연설하고 있는 이승만. 이승만은 이 때 서재필로부터 처음 토론과 연설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근대적 시위

 필립 제이슨의 이러한 노력은 1898년에 결실을 맺는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형세였다. 이 때 러시아가 조선 정부에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를 '빌려' 줄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환이었다. 이 때 필립 제이슨과 윤치호, 그리고 아직 매국노가 되기 전의 이완용은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통해 '만민공동회'라는 최초의 근대적 시위를 주최한다.

 이 시위에 일만명이 넘는 서울 인민들이 참여한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 명 이었는데, 일만명이 모였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광화문 광장에 수백만이 모인 것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결국 한국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부담스럽게 여긴 러시아는 절영도를 포기하고, 한러은행을 철수시킨다. 일본도 이 시위에 압박을 받았는지 일본이 갖고 있던 광산 채굴권 몇 개를 조선에 반환한다. 이런 근대적인 방식의 시위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경험한 인민들은 필립 제이슨이나 독립협회와는 별개로 만민공동회를 독자적으로 이어가기 시작한다.

 

의회설립운동

 한편 1898년 9월, 김홍륙이란 러시아어 통역관이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이 있었다. 이에 조선 수구파는 4년 전에 폐지된 연좌제 부활을 주장하고, 정부에서는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잡아다 고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서울의 인민들은 근대적인 시민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연좌제 부활에 반대와 수구파 탄핵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한편 독립협회 회원들은 독닙신문에 근대적인 의회, 오늘날로 치면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설을 기고하곤 했었다. 이러한 주장이 연좌제 폐지 운동과 맞물리면서 1898년 가을의 만민공동회는 본격적으로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시위로 변화한다. 게다가 이 지점에서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는 별개로 활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독립협회의 경우 귀족이 중심이 되는 영국 상원 모델을 주장한 반면 만민공동회는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오늘날 국회와 비슷한 의회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서울 대안문 앞에서 벌어진 시위 현장.

1898년 만민공동회는 가을로 접어들면서 입헌군주제를 요구하게 된다. 

 

 고종은 이 시위를 막으려 했지만, 시위 참가자 숫자는 이미 2만명을 넘어섰다. 서울 인구의 10%가 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게다가 종로의 상인들도 가게 문을 열지 않는 ‘철시’ 로 이 시위에 지지의사를 표한다. 결국 고종은 대신들이 만민공동회, 독렵협회와 교섭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항복을 선언한다. 10월 19일에는 '관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정부 대표 박정양과 인민대표 백정 박성춘이 마주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렇게 고종은 ‘입헌군주국 대한제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추원 관개 개정안을 소개하고 있는 독닙신문 11월 5일자 1면

중추원 개정안은 최초의 근대적 의회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1898년 11월 5일 독닙신문 1면에 중추원 관제 개정안이 개제되었다. 원래 왕의 자문기구였던 중추원이 “법률 칭령을 제정하거나 개정에 관한 사항”을 다루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국회의 기능을 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1조 6항에서는 “인민의 의견을 듣는 사항” 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 2조에서는 의원 숫자를 50명으로 하고, 의장과 부의장을 1명씩 두도록 하고 있다.

 

촛불, 아니 장작불 집회

 한반도 최초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11월 5일, 가짜뉴스가 돌기 시작한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개혁을 지지하던 조정 대신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독립협회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만들려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고종은 이 가짜뉴스를 접하고선 의회 설립을 철회한다. 그리고 의회설립을 주장하던 독립협회 회원들을 채포해 경무청에 수감하기까지.

 이 때 부터는 2016년 광화문 촛불이 연상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다음날인 11월 6일부터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또다시 시작된다. 그들은 11월 5일부터 12월 초 까지 동안 지금의 광화문 광장인 육조거리와 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인다. 이 때 시위는 한밤중까지 이어지는데, 당시 나무꾼들이 돈을 받지 않고 장작을 시위대에 기부한다. 그 바람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 광화문 앞은 시위대가 피운 장작불과 횃불로 환하게 밝혀지고 있었다.

 

 

 

 

 

 

 

1890년대 나무장수

19세기에는 나무가 주 연료였기 때문에 나무꾼들이 장작을 팔러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1898년 만민공동회에 장작을 기부해 당시 시위가 오늘날 촛불집회와 비슷한 장작불 집회로 변하도록 만들었다.

 

 

독닙신문 11월 9일자 4면

11월 8일에 비가 와서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서울 인민들이 시위대에게 방수용 모자인 갈모, 몸을 따뜻하게 할 술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 지나가던 나무장수 또한 장작을 기부했다고 한다.

 

 

 당시 독닙신문 기록을 보면 나무꾼들만 이 시위를 도운 것이 아니었다. 익명의 누군가는 300그릇의 국밥을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고, 과일장수는 과일을, 술장수는 시위대가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새로 빚은 술을 나누어주었다. 본 기자는 독립신문의 이 기사를 읽으면서 2016년 겨울에 핫 팩을 나누어주던 사람들, 각종 간식과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주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120년 전 광화문 광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2년 전 광화문에 있던 사람들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시위를 대하는 고종의 반응도 2016년 당시 대통령과 흡사하다. 고종은 황국협회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시위대를 습격하게 만든다. 황국협회의 테러 행위로 시위가 잠시 소강상태를 띄는 듯 했지만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장사꾼 김덕구가 황국협회의 몽둥이에 맞아 죽게 되자 오히려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고종은 체포한 독립협외 인사들을 석방하고 약속대로 의회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한다.

 

 

원래 처음엔 비극으로 끝난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말 대로 광화문 앞에서 벌어진 첫 번째 시위는 비극으로 끝나간다.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국 대한제국' 내각에 친일파라고 비난받던 박영효를 추천하면서 시위대가 분열되기 시작하더니, 고종은 왕궁 앞에 대포를 설치하고 군대를 투입해 강제해산을 시작한다. 그렇게 시위는 진압되었고, 독립협회는 해체되었으며, 필립 제이슨은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광화문 앞에서 타오는 최초의 불꽃은 사그라들었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을 시민사회도 붕괴했다.

 

 다시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는 얘기로 돌아가보자. 꼭 손을 자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원했던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답답해서 쓴 글일 것이다. 1898년 서울 인민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위를 진압판 고종은 황제의 권력을 명시한 '대한제국 국제'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한다. 게다가 필립 제이슨은 해방 이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방문해 "아직도 자기가 뽑은 대표를 윗사람인줄 안다" 며 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지만 1898년 시위에 참여했던 도산 안창호와 같은 사람들은 3.1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2016년에는 옛날 같으면 '윗 사람' 으로 대했을 대통령을 탄핵하고 감옥에 보내기까지 했다. 그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 2016년 촛불은 자신들이 '비극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비로소 '희극으로 마무리되는 사건'이었을 거다.

 그렇기에 더더욱 2016년의 경험을 소중히 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이 왔을 때 3.1운동을 주도한 것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최초의 국화국 정부를 설립한 것도 1898년의 실패한 혁명에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2016년에 꿈꿨던 세상을 만들려면 그 때 함께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 

 

탄핵소추 전 마지막 촛불집회가 있었던 12월 3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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