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8 (월)

대학알리

성공회대학교

[기고문] 한국에서 ‘정신병자’로 살아간다는 것

한국에서 ‘정신병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1. “와 정신병자ㄴ..”

감자탕집 TV에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이 나왔다. 방송을 보며 한참 수다를 떨던 공무원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짧은 실소를 내뱉었다. 감자탕을 다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을 했다. 공무원을 도와 마을 행사도 진행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두통이 시작됐다. 다음 날까지도 두통이 낫지 않았다. 연차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공무원이 말을 끝마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옆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 나와 PC방 살인사건의 피의자는 같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피의자는 우울증 환자다. 그는 10년 간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라고 경찰에 진술했다. 나 또한 같은 우울증 환자다. 2년 가량 약을 복용하고 있다. 군 생활 부적합 판정을 받아 동사무소에서 사회복무요원(이하 공익)으로 복무 중이다. 나는 동사무소에 복무하면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공무원이 피의자를 정신병자로 치환하면서, 나는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람을 칼로 32방 찔러 죽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해당 공무원은 말을 하며 자신의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이 편견에서 비롯된 말임을 깨닫고 이내 발언을 중지했다.

 

아주 건조하게 얘기해보자. 나는 정신질환자다. 통상적으로는 정신병자라 부르고. 정신병자라는 말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비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욕설로 통용된다. 기존 관념과 다른 행동을 하는 대상에게 비하의 의미로 “너 정신병 있냐?”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모순적으로 학교에서는 편견과 차별의 문제점을 가르친다. 폭력행위와 정신이상이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란 것은 논리적으로도, 통계적으로도 입증됐다. 이성적으로는 정신병자와 살인자를 구분하지만, 이성보다 더 가까운 사회관념은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후자를 먼저 선택한다는 것은 정신병자를 혐오하는 문화가 이 땅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입증한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몸에 증상이 나타난다. 두통은 발현 되는 여러 증상 중 하나다. 공무원의 한 마디,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각종 혐오발언에 노출된 나는 두통을 앓기 시작됐다. 퇴근하고 나서도, 잠을 자고 나서도, 게임으로 시간을 때우고 나서도 두통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 출근하지 못했다.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 남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생활하던 한 사람의 하루를 망쳤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있지만 이를 배상해줄 사람은 없다. 고통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2. ”동작 그만, 어디서 이름 빼기냐”

싸늘하다. 가슴에 병원장의 아무말이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진단은 처방보다 빠르니까. 진단서에서 내 이름 빼달라고 돈 몇 푼. 약값으로 돈 몇 푼, 병원에서 나갈 때 너무 슬프니까 술값 몇 푼.

질병 결석 처리해야 되니까 서류 한 장, 그리고 병역판정검사 때 제출 할 서류 한 장.. 에 내 이름이 없다. 내 병력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병원은 이름 뺀다고 할 때 이미 말을 해줬단다. 내 불찰이다. 그렇게 나는 병역판정검사 1급에 빛나는 현역 입영 대상이 되었다. 똑같은 이상한 체육복을 입은 남자 300명이 동시에 검사를 받으러 가는 모습을 보고 공황이 온 건 덤이었고.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다. 가족, 친구, 지인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여러분들께서 내 입영 날짜를 걱정해준다. 내가 걱정하는 건 입영이 아니다. 탈영할 것 같아서다. 밖에 나와 있는 게 힘들 때가 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는 게 두려울 때도 있다. 그렇게 발제를 망치고, 토론을 말아먹고, 친구들한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집으로 얼른 향한다. 정확히는 그래야 한다. 오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싶은 날들이 늘고 있다. 그럴 때는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집으로 도망치든, 그 감정에서 도망쳐야 한다. 근데 군 입대를 하면 난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탈영하는 꿈을 가끔 꾼다. 가까스로 헌병을 따돌리고 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자주 가던 밥집에 간다. 받아주는 곳이 없다. 다행일 수 있다. 그런 걸 받아주면 내가 무너질 것만 같다. 무너질 틈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것 또한 나의 삶입니다

놀라우리만치 티를 안 내려고 애쓰고 있다.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읺다. 더 정확하게, 내가 이렇게 살더라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정말 힘든 건 질환 그 자체가 아니다. ”너 ~ 있다며? 그러면 ~ 지 않아?” 이런 말 수도 없이 듣는다. 위로해주겠다며, 공감해주겠다며 하는 말들이 가끔은 폭력으로 다가온다. 의구심도 든다. 내가 왜 위로 받고 공감 받아야 하는가. 나는 그냥 나다. 그 질환도 나의 일부이며 그걸로 위로 받고, 면죄 받고 싶은 게 아니다.

 

추무진 한국국제보건의료 이사장은 경찰공무원을 채용 시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정신병력 유무에 관한 진료정보를 받아 채용에 활용하겠다는 경찰청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는 이유로 취업이나 보험 가입을 제한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의 문제", “국민의 정신건강을 앞장서서 예방하고 치료해할 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거꾸로 정신질환자를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펴서는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나로 살기 어렵다. 내게 무언가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말 한다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 낙인 찍히지 않을까. 용기를 내 말하고 싶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일상적이고 폭력적인 단어 몇 개에 그 용기는 사라진다. ‘정신병자’와 같은 맥락의 단어로 쓰이는 말들이 있다. 다른 형태의 가정을, 성별을, 누군가의 직업과 삶을 비하한다. 말은 다르다라도, 모두 사회적 약자이거나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단어다. 그들이 가진 정체성 자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너무나도 쉽게 가해자와 사회적 약자를 등치시킨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왜 항상 약자의 몫일까. 그냥 살아가는 것마저도 너무 벅찬데 말이다.

(익명의 학우 분들께서 작성하신 기고문입니다. 해당 글을 작성해주신 학우 분께 감사드립니다. 회대알리는 독자 여러분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드리기 위해 기고문을 받습니다. 기고문 게시를 원하시는 분께서는 회대알리 페이스북 메신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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