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김인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그는 사퇴 기자회견서 “어떤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겠다”며 “모두 저의 불찰이고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가히 ‘사립대의 민낯’이 퇴장하는 순간이었다. 그 민낯은 휘황찬란*했다. * 행동이 온당하지 못하고 못된 꾀가 많아서 야단스럽기만 하고 믿을 수 없다. 한국외대 총장을 재임했던 그는 갖갖은 논란을 낳았다. 논란도 다다익선이었던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김 전 후보자 가족 4명 모두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 장학금에 선발된 사실에 특혜 의혹을 빚었다. 또한, 과거 군 복무 당시 대학원 과정 일부를 다녀 특혜 논란이 일파만파 번졌다. 점입가경으로 총장 당시 롯데첨단소재 사외이사를 겸임했다. 김 전 후보자 스스로 겸직을 허가해줌으로써 1억 원이 넘는 급여를 받았다. 더불어 교육부로부터 받은 감사에서 14건의 징계 처분받았다. 골프비·식대 등 업무추진비 부당집행·법인 비용 교비 회계 부당집행·김인경 골프선수 A+ 학점 특혜 등이다. 그는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사총협)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회장을 역임하면서, 꾸준히 ‘대학의 자율성 강화’와 ‘대학 규제 완화’를 외친 바 있다. 지난해 열린
관련기사 : 중앙대 성평등 잔혹사 : 2014-2021 2021년 10월, 중앙대 성평위가 폐지되었다. 2014년, 총여학생회가 사라진 후 7년 만의 일이었다. 성평위는 발언권을 갖지 못했고 해당 안건 찬성측으로 나선 토론자는 없었다. 비록 졸속이라는 꼬리표를 달긴 했지만, 대학가에 몇 남지 않은 교내 여성주의 단체가 학외로 밀려나는 일은 뼈아프다. 성평위가 떠나고 남은 부실은 장애인인권위원회(장인위)가 차지했다. 장인위는 기다렸다는 듯 성평위원장에게 연락해 남은 짐을 빼 줄 것을 요청했다. 성명문이나 대자보를 발표하는 최소한의 연대도 없었다. 학내 구성원들이 폭력의 교차성에 서 있다는 믿음, 그래서 연대해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현실의 건조함 앞에 무너졌다. 적지 않은 중앙대의 여성 학우들도 성평위의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성평등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총학의 입장에 동의하는 이들이었다. 이는 다시금 폐지 옹호 근거가 되어 ‘여성이 필요로 하지 않는 여성 기구의 정당성'을 되물었다. 실제로 안성캠퍼스의 총여학생회 회장은 직접 폐지안을 발의했고 이듬해 총학생회 회장이 되었다. 새로운 총학 회장은 취임 몇 달 지나지 않아 학생회비를 개인적으로 횡령한 혐의
교육부와 정부는 직접 학교에 가보고 이를 담은 정책을 만들어라! 어렸을 적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교대를 진학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생각과 가치관, 심지어 말 한마디에도 아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나는 교사라는 자리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교생을 나가면 교실 내 모든 아이가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고민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상위권 아이들부터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까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진행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학교 선생님들의 대답뿐이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챙겨서 운영하기에는 교실에서 신경 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기 지금까지 나는 모든 교생실습을 비대면으로 참여했다. 줌으로 진행하려니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을 아이들이 듣고는 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25명 중 소수 몇몇 친구들의 대답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화면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학생들은 말 그대로 40분의 수업 하는 동안 버려졌다. 코로나로 닫힌 학교, 오히려 드러난 학교의 중요성 코로나19 이후 초,중,고등학교가 비대면으로 운영되면서 오히려 학
왜 청년들은 대선대응에 진심일까 다가오는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지켜보며 많은 사람이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선거에 이러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거나, 내게 필요한 정책이 공약화되지 않는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 진영에 대한 네거티브로 가득 차고 ‘국민은 빠진’ 선거로 몰락한 현 기성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일 것입니다. 청년 세대를 책임지겠다는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은 문제의 본질과 어긋난 정책만 내놓고 있고, 청년 단체를 중심으로 수천 명의 청년들이 개진한 의견이 모여 수립된 정책요구안과 잘 차려놓은 토론회 기획안에도 정당들은 ‘눈치 보기식’ 답변을 내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지속적인 ‘청년 패싱’은 대선 대응을 향한 청년들의 열망을 더욱 키울 뿐입니다. 물론, 청년들도 개인마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온도가 다를 것이고, 그 이유도 다양할 것입니다. 정치의 효용을 느낄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고, 왜인지 모르게 한국 사회에서 ‘정치’, 또는 ‘정치인’이라는 단어가 지닌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이며, 정치인들의 탁상공론이 내가 살아가는 삶에 큰 변화를
지난해 11월 14일, 1,000명의 청년이 거리로 나왔다. 대학 캠퍼스와 거리에서 모은 1만 4천 개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만든 청년들의 소중한 요구안을 100개의 학생회와 청년단체, 1,000명의 참가자 손에 들려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지난 2달 동안 <2022 대선대응 청년행동>은 대선후보들에게 대학생·청년들의 요구를 담은 토론회를 제안했으나 거대양당은 아직도 유야무야 미루며 ‘청년 정책이 준비되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만으로도 후보가 너무 힘들다’며 청년들을 만나길 거부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치인들의 무관심 속에 청년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2021년 한 해, 우리는 경제 위기, 일자리 위기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기후 위기로 생존을 넘어 실존적 위기와 싸워야만 했다. <대학생기후행동>은 엄혹한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기만적인 탄소중립위원회와 문재인 정부의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규탄하며 노들섬에서, 서울 공항에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옆 사람의 손을 굳게 잡고 목이 쉴 때까지 소리쳤다. 그랬기에 지금의 대선판을 바라보는 우리의 속은 무척이나 쓰라리다. 우리의 목소리가
“한국 사회가 이렇게 청소년참정권에 관심이 많았었나?” 라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여기저기서 만 18세 선대위원장을 인선했다고 밝히고, 국회는 만 18세 피선거권에 이어 조건부 만 16세 정당 가입까지 매우 신속하게 통과시켰습니다. 몇십 년을 진짜 끈질기게 싸워 얻어낸 결과를 통해, 순식간에 청소년들이 선거의 이슈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서는 만 18세 선대위원장의 발언을 가지고 논설을 벌이고, 주변에서는 이번에 선대위원장으로, 선본 책임자로, 혹은 출마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성과들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진전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나, 우리는 좀 더 깊고 어두운 사실에 직면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아까 정당 가입에서 ‘조건부’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만,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끼실 분들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 ‘아니 정당에 입당했으면 하는 거지, 무슨 조건이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이번에 통과된 법상으로 만 16세에서 18세의 청소년들은 정당 가입을 할 때 ‘법정대리인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친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뜻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정당 가
지난 10월 27일, 숭실대학교 대학언론사 <숭대시보> 기자 전원이 해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협의를 통해 기자 해임은 철회됐지만, 그 후에도 대학 본부는 사전검열 등 편집권 침해를 자행하는 행태는 물론, 예산 문제를 들먹이며 조기 휴간을 강행했습니다. 작금의 상황은 숭실대학교 대학본부의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그들의 언론관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며, 그 역할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대학언론이 학내 정보 전달 차원에만 머무르면 대학본부 홍보부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학언론은 이 임무를 수행하되 동시에 대학이라는 사회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문제의식을 느끼며, 구성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의견을 펼쳐야 합니다. 대학본부가 비합리적인 행태를 구성원 의견 수렴 없이 독단적으로 강행할 시 대학언론이 나서서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숭실대 당국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대학언론의 가치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이는 대학언론의 존재 의미를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위협입니다. 다만, 우리는 <숭대시보 언론탄압사태>가 단지 숭대시보만의 문제가 아님을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1988년 영화 <시네마 천국>은 영화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토토와 그의 스승이자 영사기사인 알프레도와의 추억이 담긴 일생을 다룬 영화이다.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영화를 사랑하던 토토는 알프레드를 통해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며 성장한다. <시네마 천국>은 영화 매니아 토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영화가 한 개인에게 남긴 복합적인 감정의 흔적들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1. 발길이 뜸해진 영화관 일주일에 영화관에 3번 정도 갔던 코로나 이전의 과거는 까마득해진 듯하다. 앞서의 어린 토토만큼은 아니여도 나름 영화광이었던 필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과 함께 자연스럽게 영화관으로 가던 것을 일주일에 두 번, 한 번 이하로 줄이기 시작했고 2020년 하반기 때부터는 몇 달에 한 번만 가게 되었다. 넷플릭스와 왓챠 정기구독 서비스를 신청했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 어색해질 지경이 됐다. 8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해리포터를 보러 영화관을 간 것을 시작으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은 필자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던 유일무이한 공간이었다. 어떤 재미없는 영화라 하더라도, 영화관은 2시간 동안 옴짝달싹 못한 채 현실과는 동떨어져 완
새해가 밝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신년 계획 하나쯤은 고이 담아놨을 것이다. 어찌 됐건 지난해보다는 더 나은 한 해를 보내겠다는 염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2월 31일에는 많은 이들이 올해의 섭섭함과 내년의 기대감을 함께 품고 하루를 보냈었으리라. 1월 1일에서 며칠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새해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잦아들면서 신년의 설렘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한 살 더 먹은 건 맞지만, 어느새 그날이 그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일상이 천지개벽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삶이 영속성을 지니진 못해도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연속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 아닐까. 지난해 엠넷 <쇼미더머니 10>(2021) 경연곡이었던 소코도모 <회전목마>가 반응이 뜨겁다. 발매일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음원 차트 최상위권을 달리고 있을 정도다. 이쯤에는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히트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마 실재하는 청년들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 가사가 청자로 하여금 많은 공감을 샀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불확실한 미래, 팍팍한 삶 그렇담 오늘날 청년의 삶은 어떤가. 좁아터진 ‘방 하나 있는 내
학보사는 대학의 애완견인가. 혹은 학보사는 대학의 애완견이어야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그렇지 않다’이다. 흔히 ‘언론이 권력의 감시견 역할을 한다’는 고리타분한 명제를 두고 묻는 질문이 아니다. 오늘날 학보사는 ‘그렇지 않음’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특히 대학이 위기에 빠져있을 때 학보사의 역할은 더욱 빛난다. 위기에 빠진 대학은 ‘학과 통폐합을 통한 정원 감축’, ‘재정 확보를 위한 대외홍보 확장’ 등 자구책을 마련한다. 그 과정에서 학보사 기자들은 예리한 눈으로 대학 본부를 향해 끊임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학교법인의 법정부담금 미달, 학과 통폐합의 문제점, 청소노동자들의 처우개선, 학생들을 위한 복지 확충 등을 취재하고 보도한다. 하지만 대학은 위기일수록 학보사의 목소리를 배제한다. 민감한 자료 제출을 고의로 누락하거나, 자료 자체를 대외비로 취급하여 으름장을 놓는 등 민감한 내용일수록 더 완고하게 취재를 거부한다. 이는 지난해 10월 2021년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 소속 23개 학보사별 편집장 설문조사를 통해 제기된 실제 사례들이다. ‘2022년 대학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냐’고 묻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른바
심하연 부대표 신년사 한 해 동안 대학알리를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영상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대학알리 기사를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대학언론은 위기입니다. 어쩌면 위기라는 단계를 지나섰는지도 모릅니다. 대학언론과 자치기구는 점차 소멸하고 있으며, 이제는 유지하기조차 힘겨운 곳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학번이라 불리던 학생들은 이제 3학년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20, 21학번 학생들이 학내 이슈를 체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문제의식을 가지더라도 유일한 대학별 학내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선 건설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웠습니다. ‘학교’를 모른 채 ‘학내이슈’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덩달아 대학알리도 창간 및 모집, 취재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전처럼 독립언론의 필요성을 느끼는 학생들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목소리를 한데 모았습니다. ‘돌에서 피어난 꽃, 석순: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지방소멸, 인구감소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역에서 실종된 ‘청소년’, ‘대학언론의 위기, 이제는 변해야 할 때’ 등의 다양한 대학사회
올해 5월 서울교통공사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구조조정의 이유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인 부채였다. 서울교통공사는 2020년 약 1조 1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는 1조 6000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공사는 적자의 원인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승객 감소 등을 꼽았지만 적자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의 기형적인 인구구조에 있다. 현재 서울 지하철 무임승차 기준은 65세 이상이다. 그러나 급격한 고령화로 65세 이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 인구의 15.7%이다. 노인 무임승차가 적용된 1984년의 비중 4.1%와 비교했을 때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고령화는 단지 대중교통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고령화는 이제 젊은 층이 져야 할 짐이 되고 있다. 국민연금 고갈이 대표적이다. 2018년 4차 재정 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지는 2047년 적자로 전환되고 2057년에는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2030이 연금을 수령할 때는 기금이 이미 소진된 상태다. 현재 젊은 층이 주식, 코인에 올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실질임금과 실질이자율 역시
■ 한 언론사가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적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정부 관계자가 이 기사를 입수했다. 분노한 관계자가 기사가 국격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발행하지 말라고 한다. 언론사 기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공격하고 핍박한다. 그러더니, 해당 기사 발간이 취소되더니 언론사의 신문 발행 자체가 멈췄다. 기자 모두가 사실상 해임당한 것이다. 해임당한 편집국의 국장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입을 닫게 한다. 그리고 정부 관계자가 이 사태에 대해 대신 해명하겠다고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자유 서방 국가들이 합심하여 그 나라 정부를 규탄하며, 제재를 위한 논의를 착수할 것이다. 인권 단체도 들고 일어나며 그 정부를 지탄하고 비판할 것이다. ■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숭실대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숭대시보는 숭실대 장범식 총장의 일방적인 대면 수업 지침 내용을 언급한 <매일경제> 인터뷰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했다. 이를 1면에 보도하려고 하자, 주간 교수와 대학 당국이 제지했다. 이 기사가 학교의 명예와 위신 문제가 발생한다는 논리였다. 기자 전원이 1면을 백지로 발행하는 한
1. 지난 날들 주기적으로 문서 작업을 하는 나는 어떤 당혹스러움을 느꼈는데, 작년을 비롯한 옛날의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움은 둘째 치고 너무 유아적인 사고방식에 절어있는 억센 문장의 파도 틈에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간에 나는 내 일기들을 읽으면서 이만한 정신 자해도 없다고 생각해 문서들을 급하게 정리하고 그걸 삭제할까 고민하다가 이것들도 내 일부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고 웃으며 드라이브 깊숙한 곳 안 보이는 곳에 박아두었다. 작년의 일기를 여기서 모두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대충 ‘~~이 싫고 ~~에 대해서 불안하고 왜 ~~은 나에게 이런 일들을 저지르는거고 왜 나는 어디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거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기가 싫고 그리고 이 일들이라는 것도 딱히 확실하지가 않아서 나는 세상에 내동댕이 처진 기분이고~~~’ 라는 지겨운 내용들이 몇몇 단어들만 바꾸어가며 뒤범벅 되어있었다. 이제 고학번으로 진입한 마당에, 그리고 조금 있으면 졸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시기에 왜 나는 일기 정리를 했는가. 그건 내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지난 몇 년간의 나를 저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쨌거나 그때의 나를 부정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란에 소파에 누워서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는 여성이 그려진 책 표지가 과장해서 50개쯤 된다. 제목은 항상 ~해도 괜찮아- 로 끝난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소파에 누워있고 싶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 21세기, 급속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고도의 경쟁사회에 내던져졌다. 많은 경우 고등학생 때까지 소위 ‘좋은’ 대학으로 불리는 곳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다음엔 또 ‘좋은’ 직장으로 불리는 곳에 몸을 욱여넣기 위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최근에는 ‘미라클 모닝’이라는 게 유행을 하더니 사람들이 5시간씩 자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박카스를 털어 넣더라. 휴식이 죄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한 순간도 쉴 수 없는, 숨 가쁜 하루 속에서 책에서라도 누워있는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은 다들 내심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텨? 물론 버티는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당연하게 못 버티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사회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찰나의 순간에도 자기 계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게으른’ 존재로 여기는 사회적 의식을 도출해냈다.